[역경의 열매] 황성주 (9) ‘국제사랑의봉사단’ 이끌고 다시 찾은 찔마리 마을

황성주 회장 등 국제사랑의봉사단 1기 43명이 1993년 1월 방글라데시 찔마리 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전통놀이 깨금발 싸움을 하고 있다.


의과대학 교수 2년째인 1988년 1월 처음으로 해외에 나갔다. 병원을 경영하는 조은제 집사님이 개인 재산을 털어 만든 아시아구제기금의 지원을 받아 8명이 의료 봉사를 위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 방글라데시 찔마리를 방문했다.

찔마리는 방글라데시의 맨 북단에 있는 고장으로 자무나강을 끼고 있었다. 연례행사처럼 홍수가 찾아와 피해가 극심했다. 강 가운데에 있는 큰 섬에는 7000~8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홍수만 나면 물에 잠겨 주민들은 지붕 위로 피신해 토란 몇 개로 한 달을 버티는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몇 개의 섬을 방문해 진료했는데, 처음 방문했던 지역의 보건소는 설립 이래 처음으로 문을 연다고 했다. 먼지가 한 뼘 정도 쌓여 있는 책상을 치우고, 당시에 방글라데시에 계셨던 의료선교사 강원희 선생님과 함께 진료를 시작했다.

끝없이 몰려오는 환자, 부족한 의약품…. 해야 할 일은 많고 부족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토양에 요오드 성분이 부족해 갑상샘 질환 환자가 많았다. 감기, 신경통, 피부병, 기생충, 중이염, 안질환 등이 많았고 X-ray가 없어 확인할 수 없는 폐결핵 환자들 때문에 심적 고통을 받기도 했다. 환자를 보다 지쳐 잠깐 밖으로 나왔다. 눈짓 하나만으로도 많은 아이가 따라다녔다. 내가 아는 단어는 ‘께모나쵸(안녕)’와 ‘발로발로(좋아좋아)’ 두 마디였는데, 이 말을 할 때마다 아이들은 함박꽃 같은 웃음을 머금으며 나를 둘러쌌다.

그들의 얼굴과 반짝이는 눈동자를 주시하고 있자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빵도 아니요, 옷도 아니요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돌아오는 내내 나의 뇌리에서 그 아이들의 얼굴과 눈동자가 잊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반드시 이곳에 다시 온다. 오, 주님. 나에게 이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은혜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약 5년 뒤인 1992년 크리스마스 날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나는 ‘세계는 나의 교실’ ‘인류 최후의 혁명은 사랑의 혁명’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국제사랑의봉사단을 창단했다. 그리고 열흘 후 1993년 1월 사랑의봉사단 제1기 43명이 방글라데시 찔마리를 찾았다. 당시 사랑의봉사단을 모집하는 구호는 ‘찔마리로 가자’였다. 그래서 결국 마음의 빚을 갚게 되었다.

나는 그때의 감격과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 에마누엘 레비나스는 ‘얼굴의 철학’으로 유명한 분이다. 자아도취에 빠진 자기중심적 철학에서 ‘타자성’이라는 개념으로 현대 철학계의 충격을 주신 분이다. 나치 치하에 유대인으로 모든 가족이 수용소에서 죽고 홀로 살아남은 이 철학자는 ‘이웃 사랑’을 외쳤다. 그분의 철학은 ‘나와 너’라는 책으로 유명한 마르틴 부버와 더불어 철학을 자아의 동굴에서 해방시켰다. 나는 평생을 사랑의봉사단 단원으로 사역하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있다. 그 열매로 나는 30년 동안 125개국을 다니게 되었다.

정리=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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