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황성주 (10) 사역의 샘 근원이 된 빈민가와 무의촌 의료봉사

황성주 회장(앞줄 왼쪽 두번째)이 1996년 네팔의 도티로 의료봉사를 갔을 때 ‘네팔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강원희 장로(앞줄 왼쪽 세번째)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한 팀으로 시작한 사랑의 봉사단은 1994년에는 4개 팀이 6개국을, 95년에는 8개 팀이 8개국, 96년에는 19개 팀이 13개국을 섬기게 됐다. 주님이 놀라운 특권을 허락하신 것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믿음으로만 시작했던 일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이 일이 정말 소중한 사역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놀랍게도 사랑의봉사단으로 다녀온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갖게 됨은 물론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되고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삶이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의료사역에 동참할 때 가장 많은 감동을 하게 된다.

지금 돌이켜보면 사랑의봉사단은 의대 시절 빈민가 및 무의촌 진료의 경험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의대 시절을 떠올리면 가장 인상 깊은 것이 해부학이다. 연건 캠퍼스에 라일락이 필 무렵, 첫 해부학 실습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지금도 라일락을 보면 그 때 그 시절이 생각난다.

기초 의학을 배우던 1·2학년 시절에는 별로 흥미를 못 느끼던 의학 공부가 임상에 들어가면서부터 그토록 신바람 날 수가 없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했다. 그런데 학생 신분으로 임상 실습을 할 때부터 내가 약간 노숙하게 보였는지 전공의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대병원에서 인턴을 할 때는 주치의로 오인을 받기도 했다.

조교 시절에는 간호학과 강의나 다른 대학 강의를 갔는데 일찍부터 ‘교수님’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본의 아니게 선생님 행세를 한 것이 유익했던 점은 병원 전도를 할 때였다. 물론 가운을 입고 다녔기에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고 모든 환자에게도 환영을 받았다. 이때 맺은 열매도 열매려니와 믿음이 좋은 환자들이 대부분 빨리 회복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관악캠퍼스 시대가 끝나고 연건캠퍼스로 오면서 아가페 의료 봉사회를 설립했다. 아가페 운동을 주도하는 분은 이건오 박사님으로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장기려 박사 밑에서 외과수련을 받으신 분이다. 아가페 모임이 계속 발전하면서 창동에 있는 진료소에서 무료 진료를 시작했는데 나는 본과 2학년 때부터 이 일에 동참했다. 처음 환자를 볼 때의 그 두근거리는 가슴과 생명에 대한 경외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그 이후 당시 목동과 상계동에서도 주말 진료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 해 여름날, 최초로 무의촌 진료를 간 곳은 동해안이었다. 나는 당시 처음으로 강원도 땅을 밟아봤는데 버스가 굽이굽이 대관령을 넘어갈 때의 그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하조대 해수욕장을 지날 때 처음 마주친 동해안의 푸르름에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당시 진료지는 고성군 아야진이라는 조그만 어촌 마을이었는데 그때 시작된 작은 진료 보따리는 이제 지구촌 어두운 곳이면 어디라도 가는 국제 사랑의봉사단의 큰 보따리로 바뀌었다. 대학 시절의 거지순례 전도와 슬럼가 진료의 경험이 지금 세계적인 사역의 샘 근원이 된 것이다.

정리=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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