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의 외교관 시절을 끝내고 나는 전도사가 됐다. 오해하지는 마시라. 농업 전도사, 유라시아 전도사, 지속가능발전목표(SDG) 전도사가 됐다는 뜻이다.
농업 전도사란 말은 농림부가 나한테 한 말이고 유라시아 전도사는 2014년 한 경제지와 인터뷰를 한 뒤 기사에서 언급된 말이다. 그중 농업 전도사가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어릴 때 고향인 함양에서 어머니 농사일을 도우며 자연의 변화를 경험했다. 철없던 시절 도시의 삶을 부러워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자연 친화적 성품을 준 시골이 나에게 축복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서울로 올라와 잊고 있던 농업의 가치를 다시 인식한 건 2007년 카자흐스탄에서 근무하면서다. 카자흐스탄의 농토는 한여름 밤 원두막에 앉아 망을 보던 수박밭과 큰 차이가 있었다. 워낙 광활하니 토지 단위부터 달랐다.
러시아에는 이런 말이 있다. 40도 술이 아니면 술이라 말하지 말고, 영하 40도가 아니면 추위라 말하지 말며 4000㎞가 아니면 거리라고 말하지 말라. 나는 하나를 더 붙이고 싶다. 4만ha 땅이 아니면 땅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땅이 2만8000ha인 김제평야다.
카자흐스탄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내가 구축한 프로젝트는 이름부터 남달랐다. ‘100만ha 프로젝트’다. 100만ha는 100억㎡이고 약 30억3000평이다.
카자흐스탄은 땅만 넓은 게 아니라 지정학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19~20세기 초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내륙의 주도권을 두고 패권 다툼을 벌였는데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불렀다. 20세기 초 영국 소설가 러디어드 키플링이 동명의 소설을 쓰면서 유명해졌다. 소설의 배경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 소련 붕괴 후 독립한 이른바 탄(tan) 5개국이다.
카자흐스탄에서 지정학에 눈을 뜨고 농업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면 농업의 실크로드 비전을 구체적으로 세우게 한 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우크라이나에서다.
농업을 에너지 환경 의료와 물류로 연결하는 멀티 실크로드로 확장시켰다.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 대규모 영토가 있는 나라들을 연결해 농업 벨트를 만들어 농사를 지으면 우리나라는 AI 빅데이터 스마트팜 등 과학 기술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농산물을 가공해 부가가치를 올릴 뿐 아니라 신재생 에너지, 바이오, 물류 등 새로운 영역까지 연결할 수 있었다.
농업을 최고의 미래 산업으로 본 사람은 나 말고도 많았다. 대표적 인물이 이스라엘을 세계 최고 혁신국가로 만든 고(故) 시몬 페레스 대통령이다. 그는 “농업은 95%가 과학과 기술, 5%가 노동”이라고 했다.
요즘 들어 멀티 실크로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환경문제 등으로 식량 위기 우려가 나온 데다 최근 러시아가 전 세계 빵바구니인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면서다. 멀티 실크로드의 축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원자재처럼 식량도 확보해야 하는 시대를 앞당긴 셈이 됐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