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양구 (19) 가족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 가장 든든한 지원군

이양구(오른쪽) 전 우크라이나 대사는 믿음의 일가를 이룬 건 하나님의 축복이라 말했다. 이 전 대사 부부와 세 자녀 부부, 손주 등 10명의 대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


돌이켜보면 내 삶에 가장 든든한 힘이 된 건 가족이다. ‘역경의 열매’를 통해 고백한 게 있다. 살면서 가장 잘한 일 두 가지다. 하나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아내와 결혼한 것이다.

아내에겐 늘 고마움과 미안함이 있었다. 외교관은 명암이 엇갈리는 삶을 산다. 다양한 환경에서 생활한다는 좋은 점은 어둠이 되기도 했다. 아내는 그 명암의 삶을 나 때문에 함께했다. 아니 어둠이 더 많았을지 모른다. 내가 직장에 있는 동안 아내는 낯선 외국에서 단조롭고 제한적인 생활을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아내는 가정에 신경을 못 쓰는 나를 대신했다.

1남 2녀, 세 아이의 아버지란 점도 감사한 일이다. 나는 유일하게 있었던 형님이 일찍 서울로 가면서 늘 혼자 집에 있었다. 어릴 때부터 결혼하면 자녀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졌다.

그래서 나에게 아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었지만 반대로 아이들은 외교관 아버지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전학을 밥 먹듯 했다. 말이 전학이지 나라를 옮겨 다녔다. 새로운 문화 언어 환경에 적응하는 건 아이들에게 생존의 문제였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아버지의 직업을 이해하며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해 줬다. 외교관 생활 36년 중 10년을 떨어져 살았는데 이마저도 이해했다.

그런 이유로 아내는 아이들을 미국 학교에 보낼까 고민하는 나에게 “떨어져 산 시간이 많고 돈도 없다”며 단호하게 반대했다. 아이들도 부모의 결정을 따랐고 모두 한국에서 학교에 다녔다.

무엇보다 믿음의 일가를 이룰 수 있었다. 지난해 막내딸이 결혼하면서 나는 10명의 대가족을 이루게 됐다. 결혼식장은 내가 1993년 열정을 갖고 성경 공부하던 국립외교원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결혼식 인사말을 하며 아브라함의 5가지 축복을 말했다. 자녀와 땅의 약속,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는 약속, 하나님이 동행하겠다는 약속, 복의 근원이 되겠다는 약속이다. 우리 가문이 이런 축복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했다.

사랑의교회를 만난 것도 하나님 은혜다. 사실 노마드처럼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사는 외교관에게 모 교회 개념은 없었다. 사랑의교회를 알게 된 건 모스크바행 도전이 연달아 실패하던 1993년이다. 그사이 살고 있던 집의 전세 계약 기간이 끝났다. 당분간 살 집을 구하던 중 지인인 한 교수님에게 옥한흠 목사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살 집이 정해졌다. 옥 목사님을 따라 교회 인근 집을 구했고 6개월 뒤 모스크바로 떠났다.

사랑의교회를 다시 만난 건 96년부터 미국 LA 총영사관에 근무할 때다. 출석하게 된 남가주사랑의교회 담임목사님이 지금의 사랑의교회 담임인 오정현 목사님이었다. 자연스럽게 모 교회가 된 사랑의교회는 외교관의 역할을 존중해 줬다.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때부터 나를 전문인 선교사로 파송했다. 우크라이나 대사로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네덜란드 수상이자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자신의 책 ‘영역 주권’에서 각자의 직업과 일이 선교라고 했다. 나 역시 외교는 선교였다. 덕분에 나는 전문인 선교사의 사명감으로 외교에 임할 수 있었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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