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희천 (3) 주일성수 하려 보충수업 빠져… 오지마을로 좌천

1946년 6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노동 법령 실시를 축하하는 행렬. 박희천 목사는 소련군정이 실시 된 이후 은행에서 파면됐다. 뉴시스


내가 취직한 사인금융조합은 요즘으로 치자면 농협과 비슷한 곳이다. 면 소재지 금융조합이었지만 상당히 출세한 축이었다. 나는 이 조합에서 심상소학교 1년 선배인 신복윤 형님과 함께 근무했다. 상업학교에 다니는 동안 교회에 안 나가고 있었는데 이 형님이 내게 계속 말했다. “주일에는 교회에 가야지!” 결국 그 형님 채근에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됐다.

상업학교를 졸업해 직장을 얻은 데다 교회까지 다시 다니게 돼 참 행복한 시절이었다. 취직 후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다. 일본이 물러난 자리를 소련이 대신 차지했다. 당시 소련군정은 한반도 38선 이북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소련 사람들은 우리보다 민도가 낮다는 것을 체감했다. 당시에는 시계가 귀했다. 소련인들은 길에서 시계를 찬 사람을 보면 그 자리에서 빼앗았다.

소련군정은 내게도 피해를 줬다. 금융조합을 은행으로 개편한다는 명목으로 가장 최근 채용된 나를 파면했다. 조합에 들어간 지 1년 1개월 만에 직장을 잃었다. 사실상 소련군정 기간에 북한 정권이 수립됐다. 김일성이 공산 정부를 세웠고 거의 매일 새로운 법령을 선포했다. 46년 6월엔 모든 산업의 국유화를 발표했다. 이듬해 2월 나는 사인인민학교(이전 소학교) 교사로 간신히 취직했다.

이듬해 6월 산업 국유화 법령 발표 1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공산 당국의 기념식 때문에 수업을 하지 못할 경우 그 전 주일에 보충수업을 하도록 했다. 기념식을 앞두고 교사로서 주일에 수업을 해야 했지만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주일성수를 위해서였다. 역시나 월요일에 출근했더니 학교에서 큰 소란이 났다. “담임이 수업을 하지 않다니 말이 안 된다.”

그 일로 나는 평남 순천 지산면 용문인민학교로 좌천됐다. 이 학교가 있는 용문은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불리는 오지 마을로 화전민들이 사는 곳이었다. 교실이 딱 하나뿐인 학교였다. 석 달간 가르치다 그만뒀다. 스물한 살 나이에 산골짝에 있기도 힘들었고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48년 2월 평양 식산은행에 다니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자네를 신규 행원으로 추천했어.”

그런데 독보회가 걸림돌이었다. 독보회란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직장마다 생긴 조직이다. 해당 주간 화제가 된 시사 관련 기사와 문서를 읽고 발표를 하는 것이다. 매 주일 아침 10시에 출근해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식산은행에 취업하면 그 독보회에 반드시 나가야 했다. 독보회는 기독교에 대한 실질적 탄압이었다. 주일성수를 하는 교인은 제대로 직장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독보회에 참석할 수 없기 때문에 식산은행에 갈 수 없다고 했다. 그 친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직장인에게 독보회 참석은 상식인데 그걸 몰랐나. 여기가 얼마나 좋은 직장인데 포기하려고 하는 거야.” 나를 추천한 친구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은행 취직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나는 몸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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