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희천 (4) 공산당국에 넘어간 평양신학교… 기독교 핍박에 폐쇄

박희천 목사가 1948년 입학했던 평양신학교 건물. 공산정권이 이 건물을 빼앗아가면서 박 목사를 포함한 신학생들은 인근 교회로 옮겨 공부했다.


식산은행에 대한 미련은 차츰 떨쳐냈지만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성경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 역시 불같이 일었다. 성경을 아는 지름길은 목사가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명감보다 성경을 알고 싶은 마음으로 목사가 되는 것을 고려했다. 1948년 9월 평양신학교에 합격했다. 그런데 등록금이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3일간 금식기도를 했다.

그러자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등록금을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신학교에 간다고 하자 어머니는 별말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비한 경험이었다. 평양신학교 건물은 붉은 벽돌로 멋있게 지은 양옥이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3개 층에 강의실이 각각 3개씩 있었다. ‘이렇게 멋진 건물에서 성경을 배우다니….’ 나는 정말 기뻤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간 지 겨우 3개월 만에 학교 건물은 공산당국의 손에 넘어갔다. 학생들은 인근 교회에서 공부해야 했다. 평양신학교는 한국 장로교 유일의 신학교였다. 당시에는 서울 서대문 영천에 감리교 협성신학교, 아현동에 성결교신학교까지 전국에 세 곳뿐이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도 학생들이 평양신학교로 와서 공부를 했다. 학교는 1년 3학기제였다. 나는 이듬해 12월까지 공부했다.

아쉬운 마음이 많았다. 공산치하가 되자 웬만한 목사는 모두 월남했다. 교수가 부족했다. 일제강점기 때 미국 선교사와 함께 강의했던 교수는 딱 한 분 밖에 없었다. 미국 프린스턴신학대를 나온 이성휘 박사는 마지막까지 남아 평양신학교 학생들을 위해 강의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계속할 수 없었다. 공산당국은 49년 12월 평양신학교 폐쇄를 결정했다.

일제 때는 그래도 종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있었는데 북한 공산정권은 교회를 마구 핍박했다. 정부에 반대하는 말 한마디만 해도 잡아들였고 여차하면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다. 끔찍한 시절이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1000만명이 땅과 재산을 버리고 월남했겠는가. 공산정권은 한 가족 같은 마을 사람들을 공산당에 가입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둘로 갈라치기했다. 서로 반목하게 했다.

우리 가족은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나는 교회까지 다녔으니 늘 불안했다. 그 살벌한 환경 속에서 평양신학교 재학 시절 전도사로 일했다. 교인이 30명 남짓한 평남 대동군 용악면 하차리 하차리교회에 부임했다. 집에서 20리 떨어진 곳이었다. 토요일 저녁이면 교회로 가서 주일 새벽예배, 낮 예배, 저녁 예배를 드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겼다.

공산당은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선(민전)’을 조직하고 김일성정부 지원을 강제했다. 민전 산하에 민주청년동맹 여성동맹 농업동맹 예술인동맹 불교동맹 천도교동맹 기독교연맹이 있었다. 누구나 이 중 한 곳에 가입해야 했다. 기독교 연맹은 ‘기독교가 하나가 돼 김일성 정부를 받들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진실한 성도라면 누가 이 구호에 동의하겠는가. 그런데 49년 12월까지 평양 시내 모든 목사는 기독교연맹에 가입하라는 지침이 떨어졌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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