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희천 (5) 기독교연맹 가입 거부… 빌립보서와 찬송가 40곡 암송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성구가 담긴 빌립보서. 어용 기독교연맹 가입을 거부했던 박희천 목사는 1950년 감옥에 갈 각오로 빌립보서 전체를 암송했다.


공산정권은 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잡아가겠다고 계속 압력을 가했다. 상황이 점점 어려워졌지만 나는 다짐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을 받드는 조직에 가입할 수 없다.’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결국 나 자신과 한 약속을 지켰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다. 돌아보면 북한에서 세 가지를 하지 않은 것이 참 다행스럽다.

기독교연맹 가입, 공산당이 설립한 신학교 입학, 결혼. 월남해 목회자 지원서류를 낼 때마다 교회에서 물어봤다. “장로교에서 세운 평양신학교를 다녔나요 아니면 공산정권이 세운 기독교평양신학교를 다녔나요?” 나는 늘 당당하게 평양신학교에 다녔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기독교연맹 가입 여부를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도 자신 있게 “아니오”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여자들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결혼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내가 남쪽으로 왔을 때 24세였는데 북한에서는 그때까지 결혼하지 않으면 노총각이라고 했다. 기독교연맹 가입 문제로 숨어 지낸 나로서는 결혼을 꿈꿀 수 없었다. 북쪽에서 결혼하고 남쪽에서도 결혼하면 중혼이다. 교회 초빙될 때 문제가 됐다. 중혼 사실이 알려지면 교회를 사임할 정도로 당시 교회법 치리는 엄격했다.

1950년 초부터 북한은 드러내놓고 전쟁을 준비했다. 2월부터 27세 이하 청년을 강제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낮에 훈련하다가 저녁이면 트럭에 싣고선 바로 군부대로 가버렸다. 우리 집은 하필 파출소 맞은편이어서 늘 조마조마했다. 20대인 나는 눈에 띄기만 하면 바로 끌려갈 판이었다. 청년들을 소집하는 와중에도 이상하게 파출소 코앞 우리 집은 수색을 하지 않았다.

6월 25일 기어이 전쟁이 시작됐다. 북한의 남침이었다. 나는 토요일 하차리교회에 가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몰래 집으로 돌아와 일주일 내내 숨어 지냈다. 교인들은 신기해했다. “젊은 사람이라면 다 잡아가는 마당에 전도사님은 무사하네요.” 나 역시 연유를 알 수 없었고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기독교연맹 가입 마감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투옥되거나 순교를 각오해야 했다.

나는 빌립보서 암송을 시작했다. 믿음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최원초 목사님이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해 감옥에 갈 준비를 하면서 빌립보서를 암송하셨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감옥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쓴 서신이다. 나도 최원초 목사님을 따라 빌립보서를 다 외웠다. 그다음 감옥에서 힘을 얻을 찬송가 40곡을 골라 암송했다. 그러고 나니 다소 마음이 놓였다.

나는 연약한 인간이었다. 온종일 빌립보서를 외고 찬송가를 암송하며 잠자리에 들어도 다음 날 아침이면 모래성처럼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회개하고 힘을 얻어 잠자리에 들어도 아침이면 역시 흔들렸다. 그렇게 마음을 다지고 있는데 군사증 문제가 불거졌다. 군사증은 남한의 병적계와 같다. 공산정권은 청년들에게 50년 8월 5일까지 반드시 군사증을 받으라고 공표했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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