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희천 (7) 중공군 공세로 피란… 서울 가는 마지막 열차에 올라

1950년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중구 저동 일대와 영락교회. 박희천 목사가 1950년 12월 서울로 피난해 처음 찾아간 곳은 영락교회였다.


가족과 헤어진 후 평양으로 향했다. 국군이 평양을 거점 삼아 다시 북쪽으로 밀고 올라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양으로 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은 다 서해안 진남포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왜 진남포로 가냐고 했더니 실망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대동강 건너 선교리에 이미 중공군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평양으론 못 갑니다. 피할 곳은 진남포밖에 없어요.”

별수 없이 진남포로 향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걷기 시작했다. 500m쯤 걸었을까. 청년 서너 명이 씩씩하게 무리를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에게 어디 가는지 물었다. “어쨌든 평양에 한번 가봐야죠.” 나는 그들의 결연한 표정에 용기를 냈다. 나도 그들을 따라 평양에 가보기로 했다. 우리는 역행해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 도착해보니 중공군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꾸 피난을 가자 공산당이 인적 자원을 남한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 같았다. 대동강은 인산인해였다. 철교는 이미 부서졌고 나무다리 하나가 유일한 통로였다. 그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백사장에 가득했다. 몇 날을 기다려도 다리를 건널 수 없을 정도로 줄이 길었다. 꾀를 냈다. 얼음이 언 강 위를 조금 걸어가 나무다리 중간에서 위로 올라갔다.

12월 8일 황해도 사리원에 도착했다. 거기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서울로 가느냐, 서해안 해주로 가느냐. 사람들이 우왕좌왕했다. 구름 떼처럼 몰려가는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는지 물었더니 면박이 돌아왔다. “그저 남들이 가는 길로 따라오구려. 무얼 그리 꼬치꼬치 따집니까?” 다시 여기저기 물어보니 그 길은 해주 가는 길이라고 했다. 서울로 가는 큰 길은 국군 헌병이 막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큰 길 옆 농부들이 사용하는 농로를 따라갔다. 헌병이 막은 길을 우회해 내려가 보니 또 다른 사람들은 서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사리원을 지나 신막이란 곳에 도착했을 때 마침 서울로 가는 열차가 막 출발하려는 중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다. 그 열차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였다. 그 기차를 타고 12월 9일 토요일 서울역에 도착했다.

12월 5일에 출발해 단 나흘 만에 서울에 도착한 것이다. 아마 그 전쟁통에 평안남도에서 서울로 온 사람 가운데 내가 최단 시간을 기록했을 듯하다. 마지막 열차를 타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첫날 밤을 서울역 대합실에서 보내고 1950년 12월 10일 주일을 맞았다. 서울역 광장에서 만난 사람에게 “교회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내 북한 말투를 알아본 사람이 “명동에 가면 이북 사람이 많이 다니는 영락교회가 있다”고 알려줬다. 서울역에서 물어물어 영락교회에 가보니 평양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학우들이 많이 있었다. 얼마나 반갑던지 얼싸안고 한참 인사를 나눴다. 해방 직후 월남한 피난민들이 영락교회를 세웠다고 했다. 영락교회는 피난민 임시 처소를 마련해 이북에서 온 사람들을 정성껏 대접했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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