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국창 (7) 1년 반 매달린 끝에 순수 국산 부품 개발 성공했지만…

강국창(단상 위 오른쪽) 장로가 1981년 공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새마을운동 전진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서울 청파동 굴다리는 아주 허름했다. 주위엔 판자촌이 즐비했다. 그곳에서 공장이 시작됐다. ‘성신하이텍’. 대충 간판을 세워놓고 공작기계 한 대만 마련한 상태로 일단 문을 열었다.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은 몽땅 공장을 짓는데 쏟아부은 터라 이제 막 꾸린 가정 형편은 어려웠다. 다행히 아내는 나의 사정과 꿈을 알고 이해했기에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주었다.

가장 먼저 도전한 분야는 냉장고 문이 닫히는 부분에 사용되는 자석 패킹이었다. 냉장고의 일정 온도를 유지하는 데 핵심 부품이었다. 우리 기술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

‘자석 패킹은 재질도 중요하지만 압출(특정한 제품 모양을 연속적으로 만들어 내는 공정) 실력도 있어야 해.’ 열악한 상황 속에서 시도하고 또 시도했다.

“사장님, 이것 좀 보세요. 웬만큼 성능을 내는 것 같은데요.” “웬만한 성능으로는 안 되지. 자, 여길 보라고. 이게 일본에서 만든 자석 패킹인데 우리가 만든 거랑 뭐가 다른지 좀 봐봐.” 일본의 기술이 괜히 선진 기술이 아니었다. 그들의 섬세함과 디테일은 정말 배워야 할 점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1년 반이 흘렀다. 노력은 배신을 하지 않았다. 수백 번 시도하고 실패하기를 반복한 끝에 마침내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자석 패킹 부품을 개발했다. 여기서 개발이란 냉장고에 장착되었을 때 본래 기능을 완벽하게 해내는 수준을 의미한다. “와! 해냈다, 해냈어. 거봐! 하면 되잖아.”

드디어 국내 기술로 만든 부품 1호가 탄생했다. 자석 패킹을 개발하던 일련의 과정과 결과는 우리에게 ‘하면 된다, 최선만 다하면 언젠가 결과가 뒤따른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보여준 선물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내 생각이 복잡해졌다. 물건이 있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팔아야 자금이 회전된다. 이제부터는 영업 싸움이었다. 시장이 돌아가는 판도는 우리에게 유리했다. TV 보급률이 치솟으면서 가정마다 텔레비전이 놓이자, 이제는 냉장고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다. 나는 본격 영업에 들어갔다.

“저… 부장님, 안녕하세요. 강국창입니다. 제가 부품 공장을 시작했습니다. 이 자석 패킹이 저희가 만든 국산 부품이거든요. 한번 써봐 주세요.” “알았어요. 일단 두고 가세요. 보고 연락 드릴게요.” 순수 국산 기술로 개발했다는 말에는 못 미더운 눈치가 역력했다.

연락을 준다는 사람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그때 직장생활 시절 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부품 담당자였던 나는 부품을 수입할 때마다 상공부에 부품 국산화 계획서를 제출했었다. 그 경험과 함께 이런 생각이 불쑥 파고들었다.

‘정부도 부품 국산화를 권장하고 있는데 왜 우린 이렇게 찬밥 신세일까. 국산품을 만들어 냈는데도 써주는 곳이 없다면 이건 국가에도 책임이 있다. 정부의 힘을 빌려보자.’ 나는 공장에서 만든 부품을 챙겨 들고 곧장 상공부로 달려갔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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