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65-10월 12일] 정말 그 복을 원하는가 (팔복산)



찬송 :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 546장(통399)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마태복음 5장 1~12절


말씀 :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장 유명한 설교로서 우리에게 참 익숙한 설교입니다. 반면 가장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설교이며 그 말씀대로 가장 살아내지 못하는 설교입니다. 모세가 40일 금식 후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아왔을 때 노예였던 백성들은 새로운 나라의 하나님 법이 너무 어색하고 불편했습니다. 그들은 쉬지 않고 일해야 하는 노예근성이 있는데 안식일에 쉬라고 하는 법조차도 어려워 했습니다. 출애굽 한 백성이 가장 이해 못 하고 힘들었던 것이 바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법인 산상수훈과 팔복(八福)을 주십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주시는 새로운 법은 아무 생각이 없는 ‘무리’가 지켜 낼 수 없는 법입니다. 제자들만 지킬 수 있는 법입니다. 이 새로운 법은 율법을 뛰어넘는 은혜의 법으로 고도의 윤리와 실천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팔복은 예수님 때문에 가난해야 하고, 예수님 때문에 애통해야 하며,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아야 하는 복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사모하는 온유와 화평조차도 예수님을 빼고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복이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만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 복을 받고 싶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될까요. 이게 복이라고 외쳤을 때 교회 안에 남아있는 성도는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이미 세상의 복에 대한 가치가 자리 잡고 있어서 복에 대한 개념 자체가 비틀어져 있습니다. 어쩌면 팔복을 내 마음에 담기 위해서는 어디부터 뜯어고쳐야 할지 암담한 느낌마저 들 수도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생각하고 명상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내라고 주신 말씀임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수년 전 한 집사님이 산상수훈을 읽으면 자괴감이 든다고, 그렇게 살지 못해 그 말씀을 읽는 것조차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집사님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시체는 아무리 찔러도 움직이지 않아요. 집사님이 힘드신 이유는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순종하려고 했기 때문에 힘든 겁니다. 살아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위로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옛 조문에서 우리를 해방하시는 분인데 왜 이런 어려운 법으로 다시 우리를 매어놓는 것일까요. 팔복은 율법처럼 구원받는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구원받은 후의 감탄입니다. ‘복이 있도다’라는 헬라어 ‘마카리우스’는 감탄 형용사입니다. 값없이 구원받은 자들의 감사와 감격의 상태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좋겠다 심령이 가난해서, 좋겠다 애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하는 희생은 절대 희생이 아니라 낭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주어진 복이 팔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낼 수 있고 살아내야 합니다.

기도 : 하나님, 구원받은 감사와 감격으로 주어진 팔복의 말씀을 감격과 기쁨으로 살아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조순미 목사(인천 올리브나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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