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유이상 (9) 거래처 담당자의 부당한 납품 갑질에 사업 접을까 고민

유이상 풍년그린텍 대표가 경기도 안산 계란판 공장에서 제품 생산 공정과 유통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안산=신석현 포토그래퍼


포장박스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거래처에서 어떤 주문을 하든 대부분 맞출 수 있다. 그만큼 경쟁이 심한 사업 분야라는 뜻이기도 하다. 풍년기업사 같은 납품업체는 거래처에서 주문을 받아 생산하면 수익이 나는 품목 외에 별 수익이 없는 몇 가지 제품도 같이 제작한다. 수익이 별로 나지 않는 품목도 주문을 받는 이유는 이익을 내는 품목의 거래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납품처를 결정하는 담당자의 의사 결정이다. 담당자에게 밉보이면 수익이 나는 주문을 한순간에 잃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 담당자가 수익 나는 주문의 견적을 받고, 자신이 밀어주려는 업체에게는 그보다 낮은 가격의 견적을 받는다. 자연스럽게 밉보인 기존의 업체는 견적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아무리 사장과 친분이 있다 해도 견적에서 차이가 나면 어떤 사장도 우리 회사를 납품업체로 선정하기 힘들다. 이런 구조에서 납품업체들은 담당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뒷거래도 서슴지 않는다. ‘납품’이란 구조는 시스템으로 투명성을 확보하지 않는 한 이 같은 비리 가능성을 언제나 안고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늘 마음의 갈등이 있었다. 사장은 나를 신뢰하고 일을 맡기는데, 내가 담당자에게 뒷돈을 주고 납품을 계속하게 해 달라고 해야 할까. 결정권을 가진 담당자는 자신의 힘을 믿고 납품업체에 이런저런 무리한 요구를 하고,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사장에게 “납품업체에 문제가 많다”고 험담을 하면서 업체를 바꾸려고 한다. 회사의 신뢰도와 제품의 경쟁력, 직원들의 성실함과 실력이 아닌, 담당자의 심사에 따라 계약이 좌우된다는 현실이 너무 큰 안타까움으로 느껴졌다.

담당자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다 보니 고수익이 나는 주문은 점점 줄어들었다. 별로 수익이 나지 않는 소량의 품목들을 주문받았을 때는 손해가 나더라도 장래를 내다보고 울며 겨자 먹기로 감수해야 했다. 한 회사와 오래 거래를 하다 보면 포장박스의 수요 예측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주문량이 적은 포장박스도 어느 시점에 소진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리 제작해 둔다. 그런데 담당자의 마음이 바뀌어 그마저도 제작업체를 교체해 우리 회사에 주문하지 않으면, 그 재고는 모두 우리 회사가 떠안아야 하는 손실이 되고 만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서서히 포장박스 사업에 매력을 잃어 갔다.

영세한 사업장엔 운영자금이 항상 부족했다. 기계도 시설도 좋지 않으니 좋은 거래처를 얻기도 힘들었다. 그러던 중 봉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던 대형 회사에 새로 납품을 하게 됐다. 우리 회사는 수출용 골판지로 박스를 만들어 납품을 시작했다. 그런데 시장에서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그 회사와 거래하던 업체들이 조용히 거래를 정리해 가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던 나는 속사정은 전혀 모른 채 큰 회사라는 것만 보고 거래를 시작한 것이다. 당시엔 현금 결제 대신 결제 대금을 4~5개월짜리 어음으로 받았다. 그 회사에 5개월간 납품을 했는데 일이 터졌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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