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성권 (4) 신앙생활 멀리하고 교만한 삶 살다 신용불량자로 추락

최성권 선교사가 1994년 김천대학교 졸업식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결국 대학 1학년을 마친 후 군에 입대했고, 거제도에 있는 육군부대로 배치받았다. 의무병으로 복무하는 동안 응급조치 등을 하면서 생명에 대한 소중함도 깨닫게 됐다. 그런데 군복무를 마치고 남은 학기를 공부하면서 내 삶의 가치관이 많이 달라진 듯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인정을 받고, 어떻게 돈을 벌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까”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머릿속 생각과 내 삶의 전부를 그것들이 차지하고 있다 보니 예배는 멀리하고, 교회와 멀어지게 됐다. 신앙생활은 점차 피폐한 상태로 망가져 갔다.

졸업 후 나는 방향도 목적도 없이 무작정 일자리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서울행을 택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가진 돈이 없으니 모든 게 막막했다. 그때 간 곳이 보험회사였다. 다행히 영업실적이 괜찮았고 사무일을 보는 정규직원과 눈이 맞았다. 2002년 2월 형이 결혼한 뒤 우리 부부도 그해 10월, 3년간의 열애 끝에 100주년 기념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살림은 의정부 아파트에 마련했다.

당시 서울에 근무처가 있던 형은 자신의 아파트가 있는 경기도 의정부에서 출퇴근하기가 고역이었다. 형이 서울로 전세를 얻어 나오게 되면서, 우리 부부는 결혼하자마자 형의 아파트로 들어가게 됐다.

결혼하고 안정된 삶이 이어지면서 나의 길은 비뚤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교만한 삶이 문제였다. 그때는 어느 누구의 말이나 조언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서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아내와 함께 신나게 삶을 즐겼다.

하지만 그것이 위기의 신호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부터 삶의 위기를 맞았고 날개 없는 추락이 시작됐다. 수중에 있던 돈은 씨가 말랐고, 형의 아파트마저 은행 차지가 되고 말았다. 나는 그만 신용불량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뭔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했다. 그러다 보니 그 당시에 해보지 않은 일들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의 시궁창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정신 없이 일하는 것, 오직 그것 뿐이었다. 가락동 시장에서 마늘 배달부터 시작해 부동산 중개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돈이 조금 모이는가 싶었지만 그마저도 언 발에 눈 오줌에 불과했다. 일이 점차 늘어나면서 몸은 지쳤고 감당하기 힘들어 길거리로 나앉고 말았다.

이런 아들의 사정을 알게 된 어머니가 아내를 설득했다. 여기 거창으로 내려와 살라고. 그렇게 해서 아내는 4살 된 어린 아들을 데리고 무작정 시댁으로 내려갔다. 어머니와 아내는 ‘생명의 삶’을 교재로 삼고 매일 저녁마다 가정예배를 드렸다. 때로는 아내와 같이 금식을 하신 어머니는 “너만 상처받았나. 나도 상처받았다”라고 하면서 속에 있는 걸 다 드러내놓고 아내를 다독였다. 그러면서 아내도 영적으로 위로를 받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으며 변화가 일어났다. 아픔과 고통의 세월은 어느덧 3년이나 지나고 있었다.

정리=최경식 기자 kscho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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