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영걸 (12) 숨 넘어갈 것 같은 아이 붙들고 “하나님 살려만 주세요”

김영걸(오른쪽) 목사가 휘경교회 부교역자 시절인 1989년 서울 중구 남대문교회에서 임은미 사모와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나는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10여년간 휘경교회에서 보냈다. 전통적인 교회였고 신실하고 좋은 분들이 모인 교회였다. 한정원 담임목사님은 자상하고 세심하게 교회 일을 돌보시던 분이었다. 그러면서 부교역자들과도 격의 없이 함께 어울리셨다. 목회 초년병인 나에게 목회의 기본을 가르쳐주신 한 목사님을 지금도 목회 스승으로 존경하고 있다.

휘경교회 부교역자로 섬길 때 교회가 부흥하면서 주일에 두 번 드리던 예배가 세 번으로 늘어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교회가 부흥해 한 번의 예배를 더 드리게 됐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예배를 늘려도 공간이 모자라 간이의자를 통로에 설치하는 게 일이었다. 교회가 부흥한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훗날 한 목사님은 “김영걸 목사가 부목사로 있을 때 교회가 가장 부흥했다. 그때가 좋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어느 날 심방을 끝내고 집에서 점심을 먹는데 아내가 설거지하는 동안 아이를 봐 달라고 했다. 두 아이와 놀다가 식곤증 때문에 깜박 잠이 들었다. 떠들썩한 소리에 눈을 떠보니 첫째 아이가 창틀에 위험하게 올라가 있었다. 창 앞에 놓인 책상과 의자를 발판삼아 올라간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급히 일어나 첫째를 낚아채고 나니 둘째가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라 창밖을 내려다보니 둘째가 창밖으로 떨어져 시멘트 바닥에 누워있었다. 그때 우리 집은 2층이었고 높이로는 2.5층 정도였다.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급히 아래로 내려가 쓰러진 둘째를 살펴보니 아이는 축 늘어져 있었고 입에서는 거품을 내고 있었다. 이때 둘째는 17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가까운 병원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는 내내 다리가 후들거렸다. 의사가 아이의 상태를 보더니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다시 근방에 있는 경희의료원으로 차를 몰고 달려갔다. 아이가 차 안에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차 안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살려만 주세요. 불구가 돼도 좋습니다. 살려만 주시면 잘 키우겠습니다.” 경희의료원에 입원을 시키고 밤새 아이의 상태를 지켜봤다. 아이는 열이 40도까지 오르며 혼수상태에 빠졌다. 아내는 울면서 열이 내리도록 아이의 몸을 밤새 닦았다. 새벽이 되니 아이는 조금씩 안정되고 열이 내리기 시작했다.

엑스레이를 보니 아이의 머리에 금이 가 있었다. 머리가 깨진 것이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내부 출혈이 없었다. 그 후로 아이는 병원에서 치료를 잘 받고 건강하게 퇴원했다. 음악에 재능이 있어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고 지금은 미국에서 아이도 낳고 잘살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휘경교회에서 사역을 마치고 나는 담임목사를 빨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한 목사님이 부르시더니 “김 목사는 다른 교회 담임으로 가는 것보다 큰 교회에서 부교역자 훈련을 한 번 더 받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한 교회에서만 교역자 생활을 하다가 담임으로 나가면 여러 가지로 부족했을 것 같다. 1996년 한 목사님 말씀에 순종해 두 번째 부교역자 사역을 하게 된 곳은 서울 종로구 연동교회였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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