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근 (2) 늘 배 곯았던 어린 시절… 옥수수 죽 먹으려 일찍 입학

정근(오른쪽) 원장이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이던 1969년 경남 진주 상봉서동 집 마루에서 형제들과 찍은 사진.


지금도 나는 사람들에게 내 소개를 이렇게 한다. ‘지리산 속 산청 삼장 촌사람’이라고.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인다. ‘예수 믿고 봉사로 바뀐 사람’이라는 말이다.

소개한 그대로 나는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는 지리산을 뒷산이라 말하는 경남 산청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봄에는 각종 약초와 산나물이 지천에 깔렸다. 여름이면 울창한 숲이 그늘을 만들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가 더위를 가져갔다. 가을과 겨울엔 곱게 물든 단풍과 눈꽃으로 비경을 이루는 지리산을 만날 수 있었다.

자연의 풍광은 아름다웠지만, 그 시절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배를 곯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셨다. 당시 교사라는 직업은 사회적으로 존경은 받지만, 경제적 수준은 열악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교사 월급과 비교하면 박봉이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월급에 3남 2녀를 부양해야 하니 아버지는 요즘 말로 ‘투잡’을 뛰셨다. 방과 후엔 부업으로 학생들 과외를 하셨다. 어머니도 가게에 보탬이 될까 싶어 방앗간을 운영하기도 했다. 가끔 어머니가 방앗간 일을 마치고 가져오시던 달콤한 떡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닌 일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 시절 최고의 간식은 곶감이었다. 가을이면 동네 집마다 처마 밑에 곶감이 매달렸지만 곶감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감이 익기도 전에 따 먹어서다. 워낙 마른 데다 콧물을 달고 살았다. 콧물을 닦아낸 소매 끝은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였다.

주린 배를 채우려고 택한 건 초등학교 입학이었다. 그때는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들이 학교 정문 앞에서 가마솥에 끓인 옥수수죽을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아버지 덕에 한글을 빨리 깨우친 나는 여섯 살에 삼장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래도 여섯 살 아이에게 학교는 버거웠다. 지금 생각하면 300, 400m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는데 꽤 힘들게 느꼈던 듯싶다. 더구나 동급생은 말이 동급생이지 나보다 나이 많은 형, 누나였다. 키는 머리 하나 정도 더 컸다. 결국 두 달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게 그만둔 학교를 1년 뒤인 일곱 살에 다시 들어갔다. 옥수수죽 매력이 꽤 컸던 게 아닐까 싶다. 미국 군부대가 학교로 제공한 딱딱하게 굳은 우유 덩어리도 좋다고 얻어먹었다.

바다를 처음 본 건 아버지가 통영의 학교로 전근을 가면서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새로운 학교로 갈 때마다 이삿짐을 싸야 했다. 산청 산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던 나에게 통영은 처음으로 경험하는 낯선 곳이었다. 지금도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은 그때도 아름다웠다. 친구들과도 습자지를 찢어 동전을 넣어 만든 제기 하나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모두가 못 입고 못 먹던 시절이었지만 돌아보면 그리운 추억이었다.

통영에서 진주로 갈 때까지 초등학교만 다섯 번 옮긴 나에게 여섯 번째로 옮긴 초등학교는 진주 도동초등학교였다. 이후 아버지는 진주에서만 학교를 옮겼고 나도 대학에 갈 때까지 진주에서 자랐다. 나에게 어쩌면 진주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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