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근 (3) 결핵 덕에 생긴 별명 ‘빼빼’… 마른 몸 감추려 옷 껴입어

정근 원장이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71년 집 앞 마당에서 아버지와 찍은 사진.
 
'빼빼'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정 원장의 중·고등학생 시절 사진은 화재로 모두 타 유일하게 남은 건 고교 동창이 건네준 졸업앨범 사진 뿐이다.


1975년 진주 지역에서 명문고로 알아주는 진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내 인생은 찬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살면서 첫 번째 시련을 지나고 있었다. 폐결핵이었다. 중학교 1학년의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병이었다.

잘 먹지 못하던 시절이었던 데다 어릴 때부터 원체 마른 체구였다. 중학생 때 결핵은 물론 영양실조에 걸리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키가 150㎝, 몸무게가 50㎏도 되지 못했다.

당시 폐결핵은 치사율이 꽤 높은 전염병이었다. 기침할 때면 토해내는 핏덩이를 보고 공포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매월 약을 타기 위해 지금의 진주의료원인 도립병원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모든 게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감사한 건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목에 건 의사 선생님을 보며 생명을 살리는 귀한 직업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됐다.

두려운 건 따로 있었다. 행여 친구들에게 병이 알려지면 감염을 우려해 나를 멀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두려움을 극복하게 한 건 공부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3년 내내 열심히 공부하고 치열하게 투병했다. 결핵 치료란 오랜 시간 인내를 갖고 약물치료를 해야 했다.

결핵 덕에 나를 괴롭힌 단어가 있다. 친구들은 나를 ‘빼빼’라 불렀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키는 180㎝로 훌쩍 컸는데 몸무게는 여전히 53㎏으로 워낙 마르니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당시에는 그 소리가 그렇게 싫었나 보다. 여름에도 젓가락처럼 가느다란 다리를 감추려고 교복 바지 안에 잠옷 바지를 하나 더 껴입고 다녔다. 조금이라도 살이 있어 보이게 하려는 고육책이었다. 몸이 안 좋으니 여름에 그렇게 껴입고 다녀도 더운 줄 몰랐다.

마른 몸 덕에 바람까지 신경 쓰였다. 혹여나 바람이 불어 옷이 몸에 붙으면 마른 체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가장 선호하는 바람은 뒤 바람이었다. 뒤에서 바람이 불면 바지 속으로 공기가 한껏 들어와 다리통이 굵어 보였고 덩달아 기분도 좋아졌다.

아쉽게도 살을 찌우려는 노력은 번번이 효과를 보지 못했다. 집에 오면 설탕을 퍼먹어도 소용없었다.

다행히 병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진로를 결정해야 할 나이가 되면서 처음으로 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의사가 돼 아픈 이들을 치료하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것이었다.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게 됐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꿈을 이루기 위한 도전에 나섰다.

“근아, 대학은 어디로 갈 거냐”는 아버지 질문에 나는 “못해도 서울은 가 봐야겠다”고 답했다.

1977년 서울의 사립대 의대에 입학원서를 냈다. 건강한 몸은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해 준비했기에 자신 있게 서울행을 준비했다. 그리고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부산 서면에서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끝난 줄로만 알았던 투병 생활은 끝난 게 아니었다. 폐결핵이 재발했다. 가래에 피가 묻어 나오면서 죽음을 마주하는 듯했다. 스무 살 찬란한 청춘의 때에 나는 추락하고 있었다. 그냥 추락도 아닌, 완전한 추락이었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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