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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서정희 (2) 넘어지고 깨져도 새로운 모험과 도전은 신나는 일
방송인 서정희씨가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다. 넘어지고 깨지기 일쑤지만 좌절과 도전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결혼생활, 온실의 화초처럼 지냈다. 홀로 남아 많이 위축됐다. 두렵고 떨리고 나아갈 용기가 없었다. 나답지 않게 청소도 정리도 미뤄둔 채 멍하게 앉아 지내는 날이 많았다. 며칠 새벽 기도 중에 벼락처럼 깨달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어게인(Again). 다시 일어서자. 움직이자. 나아가자”고 결심하고 조금씩 원래의 나를 되찾았다. 주변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부터 시작했다. 늘 하던 일이...
입력:2022-09-21 14:05:01
[역경의 열매] 서정희 (1) 아버지 없이 살다 하나님 아버지 만났을 때가 제일 행복
방송인 서정희씨는 힘들 때마다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며 도전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저서 ‘정희’ 프로필 사진을 권영호 작가가 촬영했다. 세상에서 나를 소개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 그저 “예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은 내 이름 앞에, 그 어떤 것을 요구했다. 나는 방송인이었다가, 방송인 아내가 됐다가, CF모델로 불리기도 하고, 가끔 교수나 작가, 공간 디자이너로도 불린다. 돌이켜보니 역경의 문턱을 수시로 넘나들었던 같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5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
입력:2022-09-20 14:05: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20·끝) ‘흙수저’로 시작한 인생, 본향 꿈꾸는 ‘은혜의 금수저’로
강국창(왼쪽 네번째) 장로가 지난 6월 25일 열린 팔순축하 행사에서 가족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 6월 25일, 가족들이 마련해준 나의 산수연(팔순축하행사)은 특별한 행사였다. 가족과 친지,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인구감소대책 국민운동본부’(가칭) 발족을 위한 기금 전달식을 가졌다. 다소 의아해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나서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해 이렇게 건강하게 팔순을 맞이했다. 사랑하는 가족도 있고, 아직까지 사업도 하고 있다. 감사한 마음이 너무 커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찾...
입력:2022-09-19 14:05: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19) ‘하나님 은혜’ 선명히 경험한 삶… ‘하나님 영광’ 최우선
강국창(왼쪽) 장로가 2016년 2월 한국 CBMC 정기총회에서 아내인 최근미 권사, 가정문화원 이사장인 두상달 장로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주변에서 나를 보고 이제 그만하고 쉬라는 말을 자주 한다. 팔순이 될 때까지 전국으로, 해외로 뛰어다니고 있으니 그에 대한 위로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듣고 생각해보면 지금껏 기업을 경영한 목적이 나를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다. 분주한 시간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먹는 삼시세끼 식사도 제때 먹지 못할 때가 많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평범한 이들보다 훨씬 적다. 그러니 내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기업을 ...
입력:2022-09-18 14:05: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18) ‘은칠노삼’ 경영 철학… 늘 기도로 지혜를 구하다
강국창(왼쪽) 장로가 2012년 11월 제주 스프링데일 골프장의 ‘한국 10대 뉴코스’ 선정 기념패를 받고 있다. 작은 기업이지만 수십 년간 경영일선에 있으면서 ‘경영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때마다 자신있게 꺼내는 얘기가 있다. 세상에선 흔히 ‘운칠기삼’이라고 해서 운이 70%, 노력이 30%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표현을 조금 달리한다. ‘은칠노삼’이다. 사람의 노력이 30%, 하나님의 은혜가 70%라는 뜻이다. 인생을 살면서 만난 행운을 꼽으라고 하면 첫째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
입력:2022-09-15 14:10: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17) 조직관리 패러다임 바꾸며… ‘정직하고 공평한’ 경영 고수
강국창(앞줄 가운데) 장로가 2002년 10월 중국 웨이하이에서 열린 원창전자 유한공사 설립 준공식에서 참석자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동국전자라는 기업을 경영하면서 패러다임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동국전자가 업계 상위권에 진입하기까지는 재창업 후 1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다행이 원천기술이 있었던 터라 제조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90년대 호황기를 지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 회사는 부품 다양화를 비롯해 기술력이 뒷받침된 제품을 선보였다. 냉장고 뿐만 아니라 세탁기, 정수기, 비데 등 다양한 가전제품의 부품을 생산...
입력:2022-09-14 14:05: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16) 꿈에도 그리던 공장 짓고 원가 절감에 승부 걸어
강국창 장로가 2016년 3월 한 경제 채널의 ‘CEO자서전’ 코너에 출연한 장면. 동국전자를 시작한 1980년대 초반, 한국 경제는 올림픽을 앞두고 한창 산업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는 반걸음 뒤로 물러서서 업계를 조망했다. 잘되는 기업은 왜 잘되는지, 부품 개발 업체가 보유한 기술은 무엇인지 등을 들여다봤다. 자세히 살펴보니 원천기술은 비슷한데 아직 개발이 활발한 상태는 아니었다. 다들 생산에만 주력하고 있었다. ‘우리는 후발 주자다. 후발 주자의 경쟁력은 무엇인가. 가격이다. 그래, 어떻게 해서든지 원가를 줄여 마진을 남겨야 한다....
입력:2022-09-13 14:05: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15) 신앙으로 용기와 패기 충전하고 ‘제2 창업’ 도전
강국창(앞줄 가운데) 장로가 1988년 5월 인천공장 준공식 때 참석자들과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이제 정말 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믿음이 생겼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엎드려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저로 하여금 큰 돈을 만지게 됨으로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자그만 능력에 의지하여 자만하지 않게 하소서. 오로지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토록 인도하소서.” 이 기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업을 다시 일으키려고 하니 모든 환경이 여의치 않았다. 도시바의 의리 ...
입력:2022-09-12 14:05: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14) “강 사장님, 재기하는 데 도움 드리고 싶습니다”
강국창 장로가 ‘기업가 정신’을 주제로 특강에서 실패를 통해 얻은 교훈을 청중들과 나누고 있다. ‘그래. 다시 나가서 해봐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미세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이런 경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하는 든든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기도원에서 집에 돌아온 나는 달라졌다. 다시금 사업을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동시에 내가 만난 예수를 전하는데도 열심이었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영적으로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주변...
입력:2022-09-07 14:05: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13) “하나님 저에게 기회를 주세요” 울며불며 매달려
1980년대 중반 오산리최자실금식기도원 대성전을 찾은 성도들이 뜨겁게 기도하고 있는 모습.   기도원내 기도굴로 불리는 개인 기도실. 기도원을 또 다른 교회 쯤으로 생각하고 가게 된 곳은 바로 경기도 파주에 있는 오산리최자실금식기도원이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운영하고 있는 기도원으로, 1980년대 초반 한국교회 부흥의 교두보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여긴 하루 종일 물만 먹고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곳이에요. 예배드리는 홀에서 생활하시면 될 겁니다.” 성경에 보면 금식기도라는 것이 나온다. 예수님도 금식기도를 하셨고 ...
입력:2022-09-06 14:05:02
[역경의 열매] 강국창 (12) “하나님은 어떤 분?”… 수많은 인파에 호기심 발동
강국창 장로가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된 계기는 친구의 권유 덕분이었다. 사진은 1980년대 초 여의도순복음교회 전경. “국창아, 나랑 교회나 한번 가보자.” “교회? 거긴 뭐하러 가. 그런 데는 어디 나사 하나 빠진 사람들이나 가는데 아니냐?” “그런 건 아니고…. 나도 그렇게 교회 열심히 나가지는 않지만 한번 나가봐라. 더 이상 갈 데도 없잖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같이 가보자.” 지금은 캐나다에 이민을 가 있는 그 친구는 당시 사업을 하고 있어서 가깝게 지냈는데,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다. 친구 아내...
입력:2022-09-05 14:05: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11) 하루하루 고통 속에 떠도는 삶 “아… 죽고 싶다”
강국창 장로(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1980년대 초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집에서 아내와 두 자녀, 부모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그는 회사 부도 후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당분간 집에 들어가는 일은 엄두도 나지 않고, 남에게 넘어가게 된 회사는 더더욱 갈 수 없었다. 그토록 많았던 주변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지만 찾아갈 만한 사람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동안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깊은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도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친구였다. 나의 모든 모습을 ...
입력:2022-09-04 14:05: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10) 달콤한 국회의원 꿈 깨어나 보니 쑥대밭 된 공장
강국창(맨 뒷줄) 장로가 신혼 시절인 1973년 아내와 어머니, 남동생들과 함께 사진을 촬영했다. “당신은 아직 나이도 젊잖아. 다음에 기회가 또 있을 거야. 다음번 공천권은 꼭 받도록 힘써주겠네.” “아닙니다. 됐습니다. 저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더 이상 태백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그날로 짐을 싸서 상경해 집으로 돌아왔다. 마치 한낮의 꿈을 꾼 것 같았다. 도대체 무엇에 홀려 있었는지 스스로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과연 내가 최선을 다해야 할 일이 이 일이었는가.’ 대답은 ‘아니오’였다. 괜한 꿈을 꾸었...
입력:2022-09-01 14:05: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9) 고향 태백서 본격 선거 준비… 마음은 이미 국회의원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엿새 앞둔 1985년 2월 6일 서울 종로·중구 합동연설회에 몰린 인파들. 당시 민정당 공천을 받지 못한 강국창 장로는 국회의원의 꿈을 접어야 했다. 성공에 취해 있을 때 주변의 공격을 받는다. 나 역시 그랬다. 본의 아니게 여러 모임에 참여하면서 지역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이들과 친목을 갖게 됐다. 당시는 전두환 대통령 집권기로 예비 사단의 사단장이 영내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단장을 중심으로 지역 인사들이 모임을 가졌는데, 젊은 기업인으로 사업체를 운영하는 나를 좋게 봤는지 저녁 모임에 자주 불러주곤 ...
입력:2022-08-31 14:05: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8) 국산품 보호법에 주문 폭주… 성공의 달콤함에 푹 빠져
강국창 장로가 처음 국산 부품으로 개발한 냉장고용 자석패킹 부품. 작은 사진은 냉장고 성에를 방지하는 서리제거용 제상장치 부품. 상공부 담당 직원을 만났다. “생각해 보십시오. 정부에서는 국산 제품을 만들라 하는데 저희 같은 회사에서 만든 국산 부품을 써주지 않는 기업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 제품은 결코 성능에서 뒤처지지 않습니다. 충분히 경쟁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국산 부품을 보호하는 법을 만들어 주십시오.” 상공부 직원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국산품 보호법이 만들어...
입력:2022-08-30 14:05: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7) 1년 반 매달린 끝에 순수 국산 부품 개발 성공했지만…
강국창(단상 위 오른쪽) 장로가 1981년 공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새마을운동 전진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서울 청파동 굴다리는 아주 허름했다. 주위엔 판자촌이 즐비했다. 그곳에서 공장이 시작됐다. ‘성신하이텍’. 대충 간판을 세워놓고 공작기계 한 대만 마련한 상태로 일단 문을 열었다.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은 몽땅 공장을 짓는데 쏟아부은 터라 이제 막 꾸린 가정 형편은 어려웠다. 다행히 아내는 나의 사정과 꿈을 알고 이해했기에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주었다. 가장 먼저 도전한 분야는 냉장고 문이 닫히는 부분에 사용되는 자...
입력:2022-08-29 14:05: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6) “일본이 만드는 냉장고 부품, 직접 만들어 보자”
30대 초반 동남샤프 근무 시절의 강국창 장로가 어머니 박선규 여사와 함께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집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동신화학에 입사한 지 3년쯤 지났을 때였다. 나는 거의 매일 야근을 자처하는 꽤 성실한 회사원이었다. 일이 재미있었고 또 사명감으로 상사를 따라다니며 기술을 익히고 배웠다. 당시 국내 가전업계는 금성사(현 LG)가 주도하는 가운데 대한전선 삼양전기 동신화학 등이 포진하는 상황이었다. 국내 최초 냉장고인 금성사의 눈표냉장고를 시작으로 다른 기업에서도 냉장고 개발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당시 전자제품 기업들은 대...
입력:2022-08-28 14:05: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5) ROTC 장교로 군 복무 마치고 사회인으로 첫발
강국창(오른쪽) 장로가 1965년 3월 열린 ROTC 임관식을 마친 뒤 지인 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학 3학년이 되면서 군대 문제와 맞닥뜨렸다. 입대를 하느냐, 학군단(ROTC)에 들어가느냐를 두고 고심했다. 복무 기간은 좀 길더라도 학군단이 좋겠다고 판단했는데, 아무래도 학교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는 장점이 가장 컸던 것 같다. 나는 지역 장학금을 받는 수혜자 입장이라 학점 관리를 철저히 해야 했다. 하지만 워낙 공사가 다망하다 보니 어떤 과목은 담당 교수님을 직접 찾아가 사정을 해서 성적 관리를 하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ROTC에 지원하기에는 ...
입력:2022-08-25 14:10: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4) 서울 명문대 합격 소식에 현수막 내걸고 동네잔치
연세대 재학 시절, 언더우드 동상 앞에 선 필자. 대학 시절은 신나게 놀면서 많은 사람을 경험했던 시기였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공부를 시작했다. 일본말로 ‘후시마’라고 하는 벽장 속에 틀어박혀 책을 파고 또 팠다. 고향 친구들은 놀기 바빴다. 남녀공학이었던 터라 함께 모여 어울리는 남녀 학생들을 볼 때마다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조금만 어울려 놀아볼까’ 하는 생각이 피어오를 때마다 머리를 흔들며 뒤돌아서곤 했다. 책과 씨름한 끝에 고3 입시를 치렀다. 지금도 합격자 발표일이 기억난다.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상경해 청...
입력:2022-08-24 14:05: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3) 강인함과 인간미로 몸소 인생의 멘토 돼 준 부모님
강국창 장로 아버지인 강수원 명예집사와 어머니 박선규 명예집사의 생전 모습. 두 분이 자녀들에게 보여 준 본은 가정의 평화였고, 남겨 준 가훈은 ‘서로 사랑하라’였다. 누군가 나에게 인생을 이끌어 준 스승을 꼽으라면 부모님이 ‘0순위’일 것이다. 열 장정 부럽지 않았던 어머니의 억척스러움과 강인함, 그리고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최고의 성실함으로 열한 식구의 가정을 지키고 인간미를 보여주셨던 아버지의 부성애는 내 인생 곳곳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에 특별한 기억이 하나 있다. 태백에서 살다가 6·25전쟁이 ...
입력:2022-08-23 14:05: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2)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어머니의 밥상철학
태백공업고등학교 시절의 필자. 강원도 태백에서 유일한 고등학교였다. 어머니는 밥에 유독 민감하셨다. 광산에서 일하는 남편 월급으로 열 한 식구의 삶을 꾸려가는 입장이었기에 늘 먹는 것에 예민하셨던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신념이 철저한 분이셨다. 우리 집 밥상은 3개였다. 하나는 아버지를 위한 밥상, 또 하나는 아들 일곱이 둘러앉아 먹는 밥상, 나머지는 어머니를 비롯한 여자 형제들이 먹는 ‘맨바닥’ 밥상이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가부장 문화가 팽배했던 시절을 반영하는 풍경이었다. 하루 중 가장 즐거운 ...
입력:2022-08-22 14:10:01
[역경의 열매] 강국창 (1) ‘흙수저’로 태어난 삶… 하나님 만나 ‘막장인생’ 벗어나
강국창 장로가 최근 국민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강원도 태백 탄광촌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국민일보DB 나는 이른바 ‘흙수저’다. 탄광촌에서 태어나 어렵게 살다가 학과라고는 광산학과밖에 없던 공업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래도 다행히 연세대학교에 진학한 뒤 사업을 시작했다. 성공도 하고 무섭게 실패도 했지만 역경 속에서 다시 일어나 자랑스러운 기업인이라는 영광을 얻었다. 지금은 국내 4곳과 해외 4개국에 5개 공장을 운영하는 경영자이면서 교회 장로로, 9남매 리더로, 또 여러 직함에 따른 역할로 바쁜 일상을 이어가고 ...
입력:2022-08-21 14:05:01
[역경의 열매] 박희천 (15·끝) 1950년부터 매일 성경 읽어… 말씀으로 가득 채운 삶
내수동교회 예배당에서 함께한 박희천 목사와 차진실 사모. 박 목사는 “성경을 먹어야 성경이 나온다. 목사는 자신을 매일 성경으로 가득 채워야 좋은 설교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목사님이 잘해서 내수동교회에서 많은 목회자가 배출된 것 아니냐”고 말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보니 그렇게 됐다’는 것 외 다른 답은 생각나지 않는다. 혹시 비결이 있다면 담당 교역자들에게 부서를 맡긴 뒤 일절 간섭을 하지 않았다는 정도일 것이다. 목회할 때 내게도 큰 어려움이 있었다. 1982년 말부터 83년 초였다. 내...
입력:2022-08-18 14:05:01
[역경의 열매] 박희천 (14) 매년 교인 가정 모두 심방… 성경 구절 맞춤 처방도
박희천 목사 부부(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세번째)가 2009년 내수동교회 출신 목회자 부부들과 야유회를 갔다. 교회마다 부흥의 비결은 다르다. 다른 교회에서 시행한 것이 우리 교회에는 맞지 않을 수 있다. 많은 교회 부흥 비결을 탐구해보았지만 우리 교회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역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수동교회는 충실한 말씀 준비, 결석자 점검, 전 교인 전도대회를 통해 교인이 늘었다. 나는 매년 교인 전체의 집을 방문하는 대심방을 실시했다. 대심방을 하면서 각 가정을 방문할 때 빈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백지상태로 방에 앉아 사람...
입력:2022-08-17 14:10:01
[역경의 열매] 박희천 (13) 귀국후 내수동교회 목사로… 말씀 연구·설교 준비 온 힘
박희천 목사가 1995년 강원도 철원 김화수양관에서 열린 설교학 세미나에서 강의하고 있다. 내수동교회는 설교 요약이 담긴 주보와 설교 테이프를 무료로 나눴다. ‘이번 집회에 실패하면 나도 망신이지만, 박윤선 목사님에게도 폐를 끼치는 일이다.’ 죽을 각오로 일주일간 11차례 설교를 했다. 다행히 학생들의 평가도 좋았다. 1975년 4월 내수동교회 6대 목사로 부임했다. 전임 신복윤 목사님이 나를 천거해 오게 된 것이다. 신 목사님은 사임 후 총신대 교수로 일하다 후일 합동신학대학원대 총장을 역임했다. 유학을 다녀와서 몇몇 교회에서 시무했...
입력:2022-08-16 14: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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