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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동판에 새겨진 만세운동 참여교회 68곳
‘3·1운동 참여교회’ 기념동판을 받은 목회자들이 26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예장통합 총회는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이날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기념예배 및 행사를 갖고 동판을 수여했다. 가운데는 림형석 예장통합 총회장. 강민석 선임기자 영화 ‘암살’은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열사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1872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난 남 열사는 의병으로 활동했던 남편을 23세에 잃는다. 영양 계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그는 3·1운동을 겪은 뒤 만주에서 교회개척과 독립운동...
입력:2019-02-26 11:05:01
유관순 가문은 신앙·저항정신의 뿌리였다
유관순(뒷줄 오른쪽)과 사촌언니 유예도(뒷줄 왼쪽 두 번째)가 이화학당 동급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신앙과지성사 제공   지령리교회를 지키며 신앙을 지켰던 유관순의 숙부 유중무. 신앙과지성사 제공   1919년 4월 병천 만세운동시위 당시 유관순과 유예도의 도피를 도왔던 사촌 오빠 유경석과 그의 아내 노마리아. 신앙과지성사 제공   최태육 목사 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은 유씨 가문의 기독교 신앙과 삶 속에서 경험한 항일정신에서 출발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한반도 통일역사문화연구소 사무국장 최태육(사진) ...
입력:2019-02-26 11:05:01
“민족·국가의식, 3·1운동 이후 한 차원 높아졌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3·1운동과 통일 포럼’에서 400여명의 청중 앞에서 강연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3·1운동을 겪으면서 우리 국민에게 나와 가족, 주변을 넘어 민족과 국가 의식이 생깁니다. 민족과 국가의 존립이 생존권의 절대조건이란 걸 깨달은 것이지요.” 1919년 3·1운동 이듬해 태어나 올해 상수(上壽·100세)를 맞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전한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다. 한국근현대사의 산증인인 김 교수는 25일 서울 국회도서...
입력:2019-02-25 11:05:01
“십자가 정신으로 타인 품고 이념 넘어 애국의 큰 원 그려야”
미래목회포럼 대표 김봉준 목사(오른쪽)와 이사장 정성진 목사가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팔각정을 배경으로 성경을 펼쳐 든 채 포즈를 취했다. 탑골공원은 100년전 3·1운동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곳이다. 강민석 선임기자 모세와 에스더 그리고 사도 바울.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 위기에 놓이더라도 민족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는 점이다. 민족이 있어야 교회가 있다는 신념으로 100년 전 일경의 총칼 앞에 먼저 나선 이들이 기독교인들이다. 소수였던 기독교가 한국 사회의 중심에 서는 계기가 된 게 1919...
입력:2019-02-25 11:05:01
100년 전 그날처럼… “조국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헌신하자”
예장통합 총회 성도들이 24일 경기도 안양 평촌교회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공동예배’를 갖고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예장합동 성도들이 24일 서울 종로구 서대문교회에서 ‘3·1운동 100주년 감사예배’를 가진 뒤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한국교회가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24일 전국 곳곳에서 기념예배를 드리며 3·1운동의 원동력인 기독교 신앙 계승을 다짐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은 ...
입력:2019-02-24 11:05:01
3·1절 예배 참석 일본 목회자 “일제 만행 사죄”
일본의 목회자가 3·1운동 기념예배에 참석해 일제 만행에 대해 사과했다. 일본 그리스도교회 규슈노회장인 사와 마사유키(69·사진) 후쿠오카 조난교회 목사는 24일 서울 종로구 서대문교회(장봉생 목사)에서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3·1운동 100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해 ‘예장총회에 보내는 인사’를 낭독하고 일제의 식민지배를 참회했다. 사와 목사는 “일본이 36년간 조선을 식민 지배하고 수많은 만행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인들의 영혼과 자긍심을 훼손하며 굴욕적인 역사를 남겼다”면서 &l...
입력:2019-02-24 11:05:01
[한국기독역사여행] 일제 판사 “천황폐하가 높은가 예수가 높은가”“천황도 예수의 심판 받을 것입니다”
전북 군산 3·1운동역사공원 내 구암교회. 한국 기독교 전래 초기 미국 남장로회가 군산선교부를 세웠던 곳이다. 왼쪽은 1950년대 구암교회 예배당, 오른쪽은 사용 중인 예배당이다. 멀리 보이는 건물은 초기 미션스쿨 영명학교 건물을 재현한 ‘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이다.   박연세 (1883~1944)   목포 양동교회로 부임한 박연세 목사(가운데)가 제직들과 찍은 사진. 1930년대로 추정된다(위 사진). 박연세가 3·1운동으로 체포돼 재판에 넘겨진 상황을 보도한 당시 신문.   군산 3·1운동 발상지 ...
입력:2019-02-22 06:05:02
“기독교계 하나돼 이끈 3·1운동, 그 청년정신을 회복하자”
정성진 목사(가운데)가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 회의실에서 진행된 좌담회에서 3·1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남북통일로 나아가자고 말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보환 감독, 정 목사, 김종준 목사. 강민석 선임기자 한국교회는 1919년 3·1운동의 주역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지도자였다. 이들이 정신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구심점이었다면 전국에 흩어져 있던 교회와 미션스쿨은 독립운동의 지역 거점이자 민중의 피난처였다. 그곳에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자유와 해방을 꿈꿨고 행동으로 옮겼다. 그로...
입력:2019-02-19 11:10:01
[단독] “만세운동에 함께하면 독립될 거란 생각에 기쁘게 참가”
이화학당 학생들이 1910년쯤 서울 정동의 학교 본관 앞에서 교사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1886년 설립된 이화학당은 3·1운동의 열기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산파이자 독립운동의 요람이 됐다. 이화여대 제공 “펑”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의 굉음이 1919년 3월 1일 적막에 싸여 있던 이화학당 교정을 갈랐다. 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이 뛰어나왔다. 담장 밖에서 움트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맨 처음 만난 건 교문을 막고 서 있던 룰루 프라이 학당장이었다. “여러분의 안전은 내가 책...
입력:2019-02-17 11:05:01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정동제일교회, 목사부터 성도까지 온몸으로 항거하다
송기성 정동제일교회 목사가 지난 8일 서울 중구 교회의 벧엘예배당에서 이필주 목사가 설교했던 강대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1919년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했다가 투옥됐을 때의 이 목사(오른쪽)와 박동완 전도사.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정동제일교회 안마당에 위치한 ‘이필주 사택 터’ 표지판. 송지수 인턴기자 서울 중구 덕수궁 뒤편 정동제일교회(송기성 목사) 안마당.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현충시설인 ‘정동교회 이필주 사택 터’가 표지판으로 남아있다. 1919년 2월 27일 당시 ...
입력:2019-02-13 11:05:01
[한국기독역사여행] 교회 탄압 조사 가던 길 ‘아무도 기억 않는 죽음’
1919년 3월 3·1운동에 따른 교회 피해를 조사하던 사역자 구보라와 마거릿 벨(유진벨 부인)이 탄 차량이 열차와 추돌해 순직했던 경기도 화성시 병점역. 지난 2일 병점역에서 화성순복음교회 교인들이 전도지를 나눠주고 있다. 인근 한신대 학생들이 내건 플래카드도 보인다.   왼쪽부터 구보라(왼쪽) 선교사와 가족, 마거릿 벨(왼쪽)과 남편 유진벨 선교사.   제암리교회 피해자들의 망연자실한 모습(위쪽). 일제강점기 제암리 인근 용주사 신작로.   위쪽부터 제암교회(왼쪽)와 제암리교회 학살사건 추모탑. 제암리교회 피해...
입력:2019-02-08 05:05:01
일본 속 조선 유학생, 시대의 흐름 읽고 독립의 불을 지피다
2·8독립선언을 주도했던 일본 유학생들이 1920년 출옥한 뒤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맨 왼쪽이 1919년 2월 8일 조선YMCA에서 “지금부터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한다”고 긴급 동의했던 최팔용. 서울YMCA 제공   2·8독립선언서의 첫 장. 서울YMCA 제공 “대한 독립 만세!” 1919년 2월 8일 도쿄 지요다구 간다의 재일본도쿄조선YMCA회관(조선YMCA)에서 터져 나온 함성이 폭설이 내리던 거리를 갈랐다. 400여명의 조선인 유학생들은 일왕이 사는 황거(皇居)에서 불과 3㎞ 떨어진 곳에서 독립의 열기를 분출했...
입력:2019-02-06 11:05:01
“3·1운동은 우리가 근대 민족으로 거듭난 역사적 사건”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이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연구소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국민일보는 지난 1일부터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연중기획을 보도하고 있다. 1부에선 3·1운동의 역사적·사상적·신학적 배경을 조명했고 오해가 많은 사실들에 대한 검증을 진행했다. 기독인 민족대표 16인 가운데 변절자는 2명뿐이란 점과 3·1운동은 주일을 피해 거사일이 결정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00년 전 교파의 벽을 넘어 하나로 뭉쳤듯이 3·1정신으로 분단을 극복하자는 메시지도 ...
입력:2019-01-30 11:05:01
[단독] 美 기독교인들 일제 핍박받는 한국인 위해 대통령에 청원서
신한민보 1919년 4월 3일자 두 번째 지면. ‘셔양 교우들이 한국을 도음’이란 제목의 기사가 맨 오른쪽 상단에 실려 있다.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이 1919년 3·1운동 직후 일제의 학정으로 핍박받는 한국인을 도와달라는 내용의 연명(連名) 청원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는 미국 켄터키주 윌모어의 애즈버리대 교수와 학생, 이 지역 목회자 128명이 1919년 3월 한국을 도와달라며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연명 청원서를 보냈다는 내용의 신한민보 기사...
입력:2019-01-29 11:05:01
‘유관순의 선생님’ 앨리스 선교사를 아시나요
유관순의 선생이자 공주 영명학교 설립자인 앨리스 샤프 선교사. 국민일보DB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 열사의 수형기록 사진. 한국선교유적연구회 제공 1910년대 당시 충남 목천군 이동면(현 천안시 병천면)은 서울과 공주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이 부근을 자주 왕래하며 교회를 세웠다. 같은 면 지령리(현 용두리)에도 교회가 세워졌고 선교사들이 방문했다. 이곳에서 자란 소녀가 푸른 눈의 여성 선교사를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선교사는 소녀가 교회에 나오는 것을 기뻐했고 성경을 술술 암송하는 것을 기특...
입력:2019-01-28 11:05:01
[한국기독역사여행] “병든 자 돌보라”… 낙동강 물난리 이재민 구호 말씀 실천하다
납북 실종자 고명우 장로가 1933년 낙동강 대홍수 때 의료구호 활동에 나섰던 부산 강서구 죽림동(당시 경남 김해군 가락면). 왼쪽으로 가락장로교회와 폐목욕탕 굴뚝이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서낙동강과 김해공항 활주로 일대다. 하늘에 비행기가 날고 있다. 낙동강 대홍수 당시 가락장로교회 일대를 빼고 모두 침수됐다.   고명우 (1883~1950)   고명우(오른쪽)가 의료선교사 러들러 박사(가운데)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미국 유학시절로 추정된다(위 사진). 딸 고봉경(왼쪽)과 고황경 자매. 기독 엘리트 신여성이었다.   조선말 낙동...
입력:2019-01-25 06:45:01
영화 ‘말모이’ 인기에 선교사가 만든 ‘영어사전’ 재조명
HG 언더우드(앞줄 가운데)와 JS 게일(앞줄 오른쪽) 선교사가 1906년 성경번역위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국민일보DB   언더우드 선교사가 만든 ‘한영자전’. 국민일보DB ‘사전의 재발견’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국립한글박물관 기획전시실. 23일 이곳에 들어서자 HG 언더우드와 JS 게일 선교사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그들의 이름 아래엔 두 선교사가 1890년대에 만든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이 관람객을 맞이했다. 빛바랜 종이에 또박또박 기록된 영어 단어와 한글의 조합은 지금의 사전과 다르...
입력:2019-01-23 11:05:02
만세 운동에 기생들도 참여했을까
1919년 3월 1일 만세를 하며 행진하는 사진 속 여성들은 기생일까. 많은 언론이 이를 경기도 수원의 기생들이 시위한 것이라고 전했지만 국민일보 취재 결과 근거가 불확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3·1운동 당시 조선총독부는 엄격한 보도 통제를 실시했다. 때문에 현장 보도 사진이 드물다. 문제의 사진은 1919년 3월 5일자 일본의 석간 오사카아사히신문 2면에 실렸다. 사진 설명은 ‘1일의 경성 시내’라는 제목 아래 ‘조선인 여학생이 만세를 외치며 전찻길을 행진한다’라고 돼 있다. 왼쪽 사진엔 ‘남대문통의 해군의장대’, 아래 사진엔 ...
입력:2019-01-23 11:05:02
민족정신이 숨쉬던 교회, 물산장려·사회정화운동 펼쳐
1933년 10월 대구에서 열린 제4회 조선주일학교대회의 금주운동 결의 모습. 사진 아래 술을 마귀에 빗댄 구호 ‘주마정벌군식장광경(酒魔征伐軍式場光景)’이 적혀 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제공 한국교회는 1919년 3·1운동뿐 아니라 이후 활발히 펼쳐진 민족운동에서도 구심점 역할을 감당했다. 물산장려운동과 금주·금연 운동, 여성·청소년·농촌 운동 등 다방면에서 민족의식을 기르고 사회계몽을 하고자 노력했다. 일제의 기독교 탄압 본격화 1910년 경술국치 때부터 한국교회와 재한 외국인 선교사의 영향력을 견...
입력:2019-01-23 11:05:02
만세운동 주동자로 몰려 구타 당한 영국 선교사의 배상금, 첫 신사참배 반대의 밀알 되다
존 토머스 선교사가 일제에 받은 배상금으로 1924년 설립된 동양선교회 강경예배당 전경.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제공   토머스 선교사의 진술서가 담긴 영국 외무성 문서. 당시 경성의 영국 총영사관 대리총영사인 윌리엄 로이즈의 서명이 들어있다.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제공 1919년 3·1운동 직후 일경에 무차별 폭행을 당한 영국인 선교사의 ‘맷값’으로 지어진 교회가 있다. 동양선교회(현 오엠에스선교회) 조선감독 존 토머스 선교사는 1919년 3월 20일 충남 강경에서 만세운동 주동자로 몰려 일경에 폭행을 당...
입력:2019-01-23 11:05:02
3·1운동 거사일은 왜 주일을 피해서 결정했나
미국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에서 1919년 발행한 대한독립선언서. 태극기 위에 ‘3월 1일’이라고 날짜가 표시돼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3·1운동은 주일을 피해 거사일이 결정됐다? 정답은 ‘그렇다’이다. 3월 1일이란 날짜 자체가 주일 성수를 우선시하는 기독교인을 배려해 정해졌다. 종교 간 배려와 연합의 중요한 증거다.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 종교인으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당초 1919년 3월 3일 월요일을 거사일로 모의했다. 그해 1월 22일 사망한 고종 황제의 발인 예식이 3일로 예정돼 있어 많은 사람이 서울 종로에 모일 ...
입력:2019-01-16 11:05:01
평양-경성 연결한 장·감연합회, 전국적 만세운동의 기반 됐다
1921년 3월 1일 중국 상하이 올림픽극장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최로 열린 3·1 독립선언 2주년 기념식. 독립기념관 제공 3·1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의 합작품이었다. 장로교와 감리교의 협력은 각 교단이 부흥했던 평양과 경성을 연결한 가교가 됐다. 이 같은 연합은 당시 민중의 참여를 이끌어낸 원동력이었다. 일제강점기, 종교 지도자들이 나서지 않고는 전국적 만세운동은 불가능했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정병준 서울장신대 교수는 15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당시 인원을 모으고 자금을 동원할 곳은 전국 조직을 갖췄던 ...
입력:2019-01-16 11:05:01
[한국기독역사여행] “주님 양 돌보는 일 말고는 할 수 없다" 인민군에 맞서다
박기천(1923~1950)   이진포 사모(1950년 작고). 빨치산 피해자였다.   박기천 전도사가 1950년 9월 10일 주일예배를 마친 후 인민군에 끌려갔던 경남 거창군 가천교회 현재 모습. 종탑과 성서벽화가 평화롭게 보인다. 그러나 낡은 시골교회 예배당이었다.   고향 김천 감주교회 시절의 박기천(위쪽 사진 원 안). 박기천 아들 박래영 목사. 1950년 부모가 인민군에 희생됐다. 가천교회 부근에 기념관을 건립 중이다.   거창 산골 북상교회 현재 모습. 6·25전쟁 전 빨치산 출몰지역이었다. 박기천 전도사는 전쟁 전에 ...
입력:2019-01-11 04:30:01
선교사들 해외에 3·1운동 상황 적극 알려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의 한 민가가 불탄 모습. 일제는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제암리교회를 비롯한 일대 민가를 불태웠다. 프랭크 W 스코필드 선교사가 1919년 4월 17일 현장을 찾아 촬영했다. 국민일보DB 선교사들이 독립운동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사실일까.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엔 이미 수백 명의 선교사가 활동 중이었다. 감리교와 장로교 총회 임원 중에도 선교사들이 여럿 있었다. 그해 10월 평양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S A 모펫 선교사가 총회장이 됐을 정도로 선교사들은 활발하게 사역했다. 하지만 독립운...
입력:2019-01-09 11:05:01
최남선 “정의·자유·독립은 기독교 전해지며 생겨난 새말”
정의 자유 비폭력을 강조한 3·1운동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 국민일보DB “1956년 2월 어느 날이었다. 병상에 누워있던 육당을 위문 차 찾아갔다. ‘선생이 쓰신 3·1 독립선언서를 읽으면 어떤 기독교 사상가에 의해 쓰인 것이라고 느껴질 정도다’라고 물었더니 육당은 대뜸 ‘내게서 기독교 사상을 빼면 아무것도 없지’ 했다. 그러면서 당신은 어릴 적부터 신구약 성서만 아니라 외전(外典)까지 탐독했다는 것, 인물로서는 레프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신앙인으로서는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
입력:2019-01-09 11: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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