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시대의 폭력 앞에 스러진 젊음… 그 영혼 앞에 부끄럼은 없는 가

서울 종로구 청운동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오르면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산책길 나무 난간에 적힌 ‘서시’를 읽으며 걷다보면 시간이 멈추는 듯하다.
 
윤동주문학관
 
사진 위쪽부터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 詩碑, 시인의 언덕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 서울종로구 누상동 9번지 골목길과 윤동주 하숙집 터(태극기가 붙어있는 집).
 
윤동주문학관 제 2전시실 ‘열린 우물’(위)과 제 3전시실 ‘닫힌 우물’.




“아침식사 전에는 누상동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을 했다. 세수는 산골짜기 아무데서나 할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청소를 끝내고 조반을 마친 다음 학교로 갔다. 하학 후에는 충무로 책방들을 순방했다. 신간 서점과 고서점을 돌고 나면 후유노야도나 남풍장이란 음악다방에 들러 음악을 즐기면서 새로 산 책을 들춰보기도 했다. 또 걸어서 적선동 유길서점에 들러 서가를 훑고 나면 거리에는 전깃불이 켜져 있을 때가 된다.”(정병욱의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중에서)

수성동 계곡을 둘러싼 공원은 아담했다. 10∼15분이면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계곡 위로 끝까지 올라가면 인왕산 스카이웨이와 만난다. 큰길 하나를 건너면 인왕산 등산로와 연결되고, 스카이웨이를 따라 걷다 보면 정자를 하나 지나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이어진다. ‘서시’가 새겨진 시비 너머로 서울 시내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영혼의 가압장’- 봉인된 기억이 흐른다

시인의 언덕 아래 윤동주 문학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버려진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 만든 문학관의 모티브는 우물이다. 가압장은 느려지는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세상사에 지쳐 타협하면서 비겁해지는 우리 영혼의 물길을 정비해 새롭게 흐르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윤동주문학관은 ‘영혼의 가압장’처럼 다가왔다.

문학관은 3개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윤동주 시인의 일생을 담은 사진 자료와 친필원고의 영인본 등이 전시된 제1전시실에서 묵직한 철문을 열고 나오면 물때 낀 벽면과 하늘이 감싸 안은 ‘열린 우물’이 나온다. 열린 우물 안쪽으로 팥배나무가 가지를 드리웠다. 제2전시실은 물탱크로 이용됐던 공간의 윗부분을 개방해 중정(中庭)으로 조성한 곳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 ‘자화상’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그가 오랫동안 서서 바라보던 우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쳐지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제3전시실은 ‘닫힌 우물’이다. 또 다른 물탱크를 개조해 천장은 물론 사방이 막힌 전시실이다. 천장에서 흘러내려오는 한 줄기 빛만 존재하는 ‘닫힌 우물’은 윤동주가 생을 마감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를 연상시킨다. 물탱크로 한줄기 햇빛이 흘러들어온다. 우물은 텅 비어 있다. 닫힌 우물에서는 동주의 삶을 담은 짤막한 영상물만 하루 네 차례 상영된다. 채우기보다 비움을 택한 공간에서 시인의 삶을 더 깊게 느낄 수 있다. 형무소에 갇힌 채 29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해야 했던 시인의 마지막 순간이 봉인되었던 기억의 상자 속에서 빠져나오는 듯했다.

닫힌 하늘- 침묵하는 신에 대해 항명하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팔복’)

침묵.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주는 가장 힘든 고통이 아닐까.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할 때 함께 아파하시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았고, 자라면서 한 번도 교회를 등진 일이 없었다. 그랬던 그가 1940년 연희전문학교 3학년 때 깊은 신앙의 회의에 빠진다. 민족의 말을 빼앗기고, 겨우 남은 껍데기였던 성과 이름마저 벗기고, 노예처럼 잔인하고 사악한 폭력에 굴하는 무력한 자신과 동족을 보면서 침묵하는 하나님에 대해 절망했다. 절망감은 그의 신앙을 바닥에서부터 흔들었다.

그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38년은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조선에 적용해 한민족 전체를 전시총동원체제의 수렁으로 몰아넣던 때였다. 그의 고뇌와 번민은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39년 한 해 동안 쓴 시는 6편에 불과했다. “왜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이런 고난을 주는 것인가.” 그는 민족의 처절한 수난에도 아무런 응답 없이 침묵을 지키는 신에게 항명했다. 40년 12월쯤 쓴 ‘팔복’은 마태복음 5장 3∼12절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팔복’과 상이하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여덟 번 되풀이함으로 성경이 분류한 ‘심령이 가난한자, 애통한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를 대치했다. 이 여덟 가지 미덕을 가졌다 해도 한민족인 이상 모두 슬퍼하는 자일 뿐이라고 절규한 것이다.

‘투르게네프의 언덕’에는 기만적인 싸구려 이웃사랑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담겨 있어 그의 내면의 풍경을 짐작할 수 있다. 한민족이 겪고 있는 처참한 고난의 현장에서 그런 고난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신에게 항명한 시였다.

열린 하늘- 삶의 주춧돌을 만들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에게 빵 대신 벽돌을 던져주시기도 한다. 어떤 이는 그 벽돌을 던져버리지만 어떤 이는 그 벽돌을 모아 삶의 주춧돌을 만들기도 한다.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 그리고 고통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윤동주는 하나님이 주신 벽돌을 자신의 주춧돌로 삼았다.

번민의 터널을 지나 연희전문학교 졸업반이던 41년, 그는 내적인 방황과 자신을 짓눌렀던 역사의 무게를 시로 승화시켰다. ‘무서운 시간’에서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라며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간판없는 거리’에서 손목을 잡고 보듬는 따뜻한 민족 사랑을 시로 녹였다. 이어 ‘십자가’로 순명을 다짐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그는 모진 풍파 속에서 독립한 나라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죽음의 나락에 빠진 민족을 사랑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히라누마 도쥬’. 윤동주의 일본 이름이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일본 유학을 위해서 반드시 일본식 이름으로 바꿔야 했다. 결국 그 이름으로 42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별헤는 밤’에서 별 하나에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 보며 안타까워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본다.’ 그러나 그는 이름 하나 하나에 담긴 소중함을 느끼지만 죄책감을 감추지 못하고 모래로 자신의 이름을 덮어버린다.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윤동주가 진학한 릿교대학은 성공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이 시절의 고뇌는 ‘쉽게 쓰여진 시’에 잘 드러나 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육첩방은 바로 내 나라를 빼앗아간 남의 나라이다. 그는 육첩방에 앉아 공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독립하지 못한 조국과 부모님의 도움에 기대어 공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황에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느꼈다.

이 시를 마지막으로 윤동주는 1943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렸다. 그러나 조국의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순국했다.

시 뒤로 숨는 것 같아 죄책감을 느꼈던 그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시도 자기 생각을 펼치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 있는 진실을 드러낼 때 문학은 온전하게 힘을 얻는 거고 그 힘이 하나하나 모여서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가 노래한 시는 시대의 정신이었고 신앙 고백이었다.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것’이라고 예감한 그는 죽었으나 민족의 가슴에 여전히 살아 있다.

■[동주처럼 생각하기] “부끄러움”

윤동주(사진) 시인은 시대의 아픔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부끄러움에 대한 고백이 작품 전반에 흐른다. '부끄러움'은 정직한 자기응시와 성찰, 양심의 또 다른 언어다.

영화 '동주'에서 기억에 남는 두 장면이 있다. 그가 "이 엄혹한 시절에 시를 쓴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하자 시인 정지용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또 한 장면은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을 꾸며대며 서명을 강요하는 일본 형사에게 동주가 절규하는 모습이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시를 쓰기를 바라고,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게 너무 부끄럽고, 앞장서지 못하고 그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 게 부끄러워서 서명을 못하겠습니다."

우리는 부끄러움과 슬픔을 느끼는 감수성과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윤동주처럼 세상과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할 때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또 그의 성품 중 본받아야 할 점은 남을 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희전문 후배였던 정병욱은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에서 "그의 성격 중에서 본받을 일이 물론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본받을 장점의 하나는 '결코 남을 헐뜯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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