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들리세요? 내 안에 울리는 어머니 기도소리

봄비가 내리던 지난달 27일,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목월 생가를 방문한 한 관람객이 박목월 동상에 우산을 씌워주고 있다.
 
위는 생가 전경, 아래는 동리목월문학관에 소장돼 있는 목월의 성경책과 유품들.
 
목월 생가 안채 댓돌위에 놓인 고무신.
 
박목월


창연한 고도(古都) 경주는 한국시를 대표하는 박목월(1915∼1978년) 시인의 고향이다. 첨성대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문무대왕릉 등 많은 문화유산이 있는 경북 경주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다. 목월의 시 역시 탄생 100년이 흘렀어도 현대인들에게 널리 애송되고 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고교시절 음악시간에 목청껏 불렀던 ‘4월의 노래’가 목월의 시였다는 것을 기억하며 지난달 27일 경주를 찾았다.

목월은 쉼 없이 새로운 시의 형식을 탐구한 시인이었다. 그는 자연의 시로 시작해 신앙의 시로 귀결된 시작활동을 했다. 생전에 간행한 시집 ‘산도화’ ‘난·기타’ ‘청담’ ‘경상도의 가랑잎’ ‘무순’은 제각기 다른 내용과 틀을 보여준다. 시어로서 한국어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추구해 보여줌으로써 민족적 자긍심과 우월성을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사후에 발간된 ‘크고 부드러운 손’엔 성숙한 신앙고백으로 이루어진 71편의 시가 수록됐다. 목월의 시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시적 형상화는 주로 ‘손’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에게 신의 손과 어머니의 손인 크고 부드러운 손은 자유와 영원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손길이었다. “크고 부드러운 손이/내게로 뻗쳐온다/다섯 손가락을/활짝 펴고/그득한 바다가/내게로 밀려온다/인간의 종말이/이처럼 충만한 것임을/나는 미처 몰랐다/허무의 저편에서/살아나는 팔/치렁치렁한 성좌가 빛난다.”(‘크고 부드러운 손’ 중에서) “세상에는/감람나무보다/더 많은 어린이들이/자라고 있지만/그들의 뒤통수에/머물러 있는/주의/크고 따뜻한 손.”(‘감람나무’ 중에서)

아름다운 왕릉은 아이들의 놀이터

유년의 풍경은 한 시인의 문학세계를 들여다보는 비밀스러운 통로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경주는 ‘목월문학’의 탯줄이다. 목월은 경주의 정서를 머금고 성장했다. 달빛이 하얗게 비치는 골목길이 아이들의 놀이터요, 풀이 우거진 봉황대나 잔디가, 아름다운 왕릉이 아이들의 생활무대였을 것이다.

목월의 생가는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에 있다. 생가 인근 금척리 들판은 향토적 서정과 민요의 가락을 살린 ‘나그네’ ‘청노루’ ‘윤사월’의 무대다. 당시엔 연둣빛 밀밭이 비단길처럼 펼쳐졌었으리라.

모량초등학교 담을 끼고 약 300m쯤 골목길을 걸어가자 생가 모습이 보였다. 개울의 징검다리 위에서 물살을 정신없이 바라보다 인기척에 놀란 어린 목월이 생가에서 반갑게 뛰어나올 것 같았다. 목월은 이곳에서 보통학교 4학년 때까지 살았다. 마당엔 쉬어가길 청하는 나그네정(정자)이 푸른 밀밭 끝에 세워져 있다. 생가는 초가집으로 일자형 사랑채와 안채, 디딜방앗간으로 조성돼 있다. 목월의 약력을 새긴 비와 펜을 들고 사색하는 목월의 동상, 시 낭송장이 있다.

생가 안채 댓돌 위에 놓인 고무신 4켤레를 보자 가장의 사랑과 책임감이 느껴지는 그의 시어들이 떠올랐다. “지상에는/아홉 켤레의 신발…아랫목에 모인/아홉 마리의 강아지야,/강아지 같은 것들아/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내가 왔다/아버지가 왔다/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가정’ 중에서)

초대복음을 받아들인 어머니

목월의 본명은 영종이다. 아버지 박준필과 어머니 박인재 사이에서 2남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경주군 수리조합(지금의 토지개량조합) 이사였고 대구로 나가 중학교를 졸업한 인텔리 유지였다. 어머니는 목월이 보통학교 4학년 되던 해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모량에서 초대복음을 받아들인 어머니의 신앙은 목월의 정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때까지 집안에선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 젊은 며느리가 성경과 찬송가책을 들고 교회에 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다. 그러니 이에 못지않게 놀라운 것은 며느리의 교회 출입을 용인해준 시아버지 박훈식의 관대함이다. 어린 목월은 그러한 집안에서 법도 있는 사랑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난 것이다.”(이형기 편저 ‘박목월’ 중에서)

어머니는 모량에서 건천에 있는 교회에 다니기 어려워지자 건천교회 옆에 집을 지어 이사할 정도로 뜨거운 믿음을 소유했다. 성경을 통해 한글을 깨우쳤고 신앙으로 자녀교육을 했다. 매주 토요일이면 그의 집엔 원근 각지에서 모여든 수십 명의 성도로 북적댔다. 집이 멀어서 교회에 나오기 힘든 성도들이 하룻밤 유숙하고 다음날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연작시 ‘어머니’는 신앙을 심어준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사랑이 담겨 있다. “당신의 목에 거신 십자가 목걸이의 무게를 오늘은 제 영혼의 흰 목덜미에 느끼게 하옵소서.”(‘어머니의 기도 5’ 전문)

목월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기독교 시의 바탕으로 심화시켰다. 그에게 어머니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시인이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이 어머니에게 있었다. “유품으로는/그것뿐이다/붉은 언더라인이 그어진/우리 어머니의 성경책…이 세상에 남기신 어머니의 유품은/그것뿐이다/가죽으로 장정된/모서리마다 헐어버린 말씀의 책/어머니가 그으신 붉은 언더라인은/당신의 신앙을 위한 것이지만/오늘은 이순의 아들을 깨우치고…당신의 신앙이 지팡이가 되어/더듬거리며 따라 가는 길에/내 안에 울리는 어머니의 기도소리.”(‘어머니의 언더라인’중에서)

목월가의 믿음은 5대째 이어지고 있다. 그와 부인 유익순 권사가 서울 효동교회 부부장로였으며, 장남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 부부 역시 효동교회 부부장로다.

목월은 열아홉에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금융조합 서기가 되어 경주로 돌아왔다. 낮에는 전표 더미를 놓고 주판알을 튕기고 고도의 품을 배회하며 고독해했다. 그는 늘 혼자였다. 일이 끝나면 거리로 나왔다. 반월성으로, 오릉으로, 남산으로, 분황사로 돌아다녔다. 그가 벗할 것이란 황폐한 고도의 산천과 하늘뿐이었다. 왕릉에 누워 달을 보는 것, 기와 조각을 툭툭 차면서 길을 걷는 것, 밤이면 램프 밑에서 책을 읽는 것이 전부였다.

경주를 시로 형상화한 작품은 주로 초기 시에 나타난다. 목월의 초기 시는 자연과 향토적 정서를 특색으로 한다. 토함산 기슭의 불국사 석굴암도 ‘불국사’ ‘청운교’ ‘토함산’ 등의 배경이 된 곳이다.

목월은 1940년 경주금융조합 재직 중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해 등단했다. 그러나 그가 문단활동을 시작했던 ‘세기의 심연’은 완전한 밤이었다. 광복 후의 문단은 친일 잔재의 냉엄한 청산보다도 양분된 이데올로기 청산이 과제였다. 그가 소속된 조선청년문학가협회는 사회주의 문학가 단체에 대항하는 ‘순수문학 진영의 문학적 전위세력’이었다. 46년 조지훈 박두진과 3인 시집 ‘청록집’을 발행해 문학사적인 획을 그었으며 김동리 서정주 유치환 조지훈 박두진 등과 함께 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 그해 12월 한국문학가협회를 만들고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그 무렵 그의 시는 자연시에서 인생시로 변모했다. 광복과 6·25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 가정적으로는 동생의 죽음 등이 영향을 미쳤다. 가장으로서의 고뇌가 깊었던 시간이었다. “나는 밤이 깊도록 글을 쓴다…이것은 내일이면 지폐가 된다. 어느 것은 어린 것의 공납금, 어느 것은 가난한 시량대(음식값), 어느 것은 늘 가벼운 나의 용전…아이들은 왜놈들이 남기고 간 다다미방에서 날무처럼 포름쪽쪽 얼어 있구나.”(‘층층계’ 중에서)

그의 후기 시편들은 인생의 한계를 직시하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신앙시의 원천은 기독교적 휴머니즘이다. 어두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자기구원의 자세를 지닌다. “관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내리듯/주여/하관하옵소서/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좌르르 하관했다.”(‘하관’ 중에서)

지병이 있었던 목월은 장로 안수를 받던 해인 78년 3월 24일 새벽, 산책길에서 돌아온 뒤 갑작스럽게 영면해 수많은 사람의 안타까움을 샀다.

신라시대 화랑들의 놀이터였던 황성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제 경주시민들의 쉼터다. 목월이 문우 김동리와 작품을 구상하며 함께 거닐던 그곳엔 목월이 작사한 ‘얼룩 송아지’ 노래비가 있다.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누구나 한번쯤 불러본 동요 ‘얼룩 송아지’는 목월이 고향을 떠나 대구에서 계성학교를 다닐 때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동시다. 이 외에 경주엔 목월을 기리는 동리목월문학관과 목월공원이 있다.

[목월처럼 생각하기]
“오늘은 나의 시간이고 내일은 하나님의 시간”


목월(사진)의 작품세계는 중기 이후로 신과의 존재, 기독교 정신의 인간탐구로 변모를 겪었다. 그는 소천하기 전 몇 년간은 신앙시만 썼다. 유족들은 1979년 신앙시집 ‘크고 부드러운 손’을 발간했다.

신앙 시인으로 생애를 마친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삶과 신앙이 일치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고백이 신앙시라고 말한 그는 시작 자체가 신앙생활의 일부여야 하며, 신앙시를 씀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생활과 신앙과 시는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를 쓰는 그 자체가 신앙생활의 일부며 신앙인으로서의 작가는 신앙시를 씀으로 자신의 신앙을 확인 심화시키는 일이다.”(‘박목월 시선집’ 중에서)

목월은 ‘오늘은 나의 시간이고 내일은 하나님의 시간’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과거에서 벗어나 오늘이란 시간에 있으며, 하나님의 시간인 내일이란 미래를 향해 가기를 소망했다. “양지바른 창가에 앉아/인간도 한 포기의/화초로 화하는/이 구김살 없이 행복한 시간…주여/고르게 흐르는 물결을 따라/당신의 나라로 향하게 하십시오.”(‘평온한 날의 기도’ 중에서) 또 무덤의 돌문을 열고 그리스도가 부활했듯 딱딱한 자아의 껍질을 벗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다. “오늘은 자갈돌이라 부름을 입게 하시고/내일에는 내일의 이름을 제게도 베푸소서.”(‘오늘은 자갈돌이 되려고 합니다’ 중에서)

그는 죽음에 대해서도 죽음이 곧 부활이라는 기독교적 인식을 보인다. 죽음은 순례자가 이르는 마지막 귀착점이며 내세는 진정한 생명의 세계인 것이다.


경주=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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