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1편>] 그날의 개혁, 오늘 교훈으로… 한국교회 갱신 대장정 나선다

종교개혁500주년 특별기획 제1편에서는 독일과 스위스를 중심으로 ‘오직 성경으로’의 여정을 담는다. 사진은 왼쪽부터 독일 아이스레벤의 마르틴 루터 생가와 스위스 취리히대 신학부 정문.



 
바르트부르크 성

국민일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2017년 10월을 앞두고 ‘종교개혁 500주년 특별기획-영성의 현장을 찾아서’를 연재합니다. 총 50회로 예정된 대기획을 통해 당시 종교개혁 영성의 현장을 추적하고, 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독일에서 촉발된 종교개혁은 전 유럽에 확산됐고 미국을 건너 마침내 131년 전 한반도에 당도했습니다. 이번 특별기획은 순전한 복음을 담은 성령의 기류를 탐색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전문 학자와 목회자들이 직접 현장을 방문, 취재했습니다. 종교개혁의 5대 주제별로 소개합니다. 제1편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를 만나보십시오.

독일과 스위스 종교개혁 현장으로의 여행은 지난달 8∼15일 이뤄졌다. 독일에서는 나흘 동안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1483∼1546)와 몇몇 인물을 만났다. 역사적 현장인 스위스 취리히를 중심으로 츠빙글리(1484∼1531)와 그의 동료들의 흔적을 살펴봤다. 독자들이 머릿속에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독일과 스위스에서 보낸 한 주간의 일정을 먼저 소개한다.

독일 루터의 종교개혁 현장을 찾아서

독일 베를린에서 아우토반을 이용해 종교개혁의 중심지 비텐베르크를 찾았다. 루터 식구들의 보금자리였던 생가를 비롯해 루터가 학생으로서 배우고 교수로서 가르쳤던 비텐베르크대학이 있는 곳이다. 이 대학은 종교개혁 사상의 근원지다. 이곳엔 루터의 대학 제자이자 동역자, 그리고 후계자가 됐던 필리프 멜란히톤(1497∼1560)의 생가도 있다.

무엇보다 비텐베르크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를 붙여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 현장, 슐로스(Schloss) 교회가 있다. 슐로스는 ‘성(城)’이란 뜻이다. 작센의 성주 프리드리히 현공이 출석했던 교회이자, 루터가 박사학위를 받았던 장소다. 지금은 루터와 멜란히톤의 시신이 강단 아래 좌우로 묻혀있다. 루터는 당시 교회가 십자군 전쟁과 로마교황청의 증축 경비 명목으로 면죄부를 팔던 행태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했다.

루터가 1514년부터 비텐베르크 대학의 스승 슈타우피츠의 추천을 받아 설교자로 활약했던 비텐베르크 슈타트키르헤(시교회)도 방문했다.

다음날 라이프치히로 향했다. 루터가 활약했던 곳으로 그의 영향력이 여기저기 퍼져 있었다.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성으로 향했다. 이 성은 농노로 변신한 루터의 피신 장소이며, 1522년 세상에 처음 선보인 독일어 ‘9월 신약성경’의 번역 현장이다. 바르트부르크성은 깊은 산 속 꽤 높은 곳에 위치해있었다. 500년 전에는 정말 아무도 찾아갈 수 없는 은밀한 장소였을 것 같았다.

다시 발길을 북쪽으로 돌려 루터가 법학을 공부했던 에어푸르트대학, 그리고 루터가 갑작스럽게 수도사가 되어 생활했던 에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찾았다.

다음 행선지는 아이스레벤이었다. 이곳은 루터의 출생과 사망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도시다. 루터가 태어난 집과 루터가 사망한 장소는 역사적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쉬움을 주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루터의 생과 사를 이어주는 현장으로서 그 의미는 충분했다. 게다가 루터의 고향집에서 도보로 몇 분이면 루터가 어린 아이 시절 세례를 받았던 프레디거교회를 방문할 수 있었다. 교회는 소년 루터가 초등학교를 가기 전까지 다녔던 곳으로 지금은 현대식으로 새 옷을 갈아입었다.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루터가 신학 논쟁을 전개한 역사적 현장인 플라이센부르크성을 찾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 플라이센부르크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현지인들은 외국인인 필자가 그 성을 찾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다행히 역사적 식견을 지닌 독일인 한 명을 만나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그 성터 위에는 라이프치히 시청이 들어서있다.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추기경 요한 에크와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슈타트, 멜란히톤 사이에 이루어진 논쟁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당시 로마교회가 강조하는 교황권과 로마 교회의 권위가 근거 없음을 주장하며,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이 진리의 규범임을 내세웠다. 이 논쟁은 당시 라이프치히대학교가 주관해 공개적으로 진행됐다.

이번에 가서보니 플라이센부르크성은 없어졌지만 라이프치히대학교는 시청에서 도보로 몇 분 거리에 있었다. 다만 아쉽게도 라이프치히대 캠퍼스 역시 옛 모습은 사라지고 독일 통일 후 초현대식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또 다른 종교개혁자로 일컬어지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바흐가 27년간 주일예배 지휘자로 활동하며 작곡도 했던 토마스교회를 찾았다. 루터와 바흐는 아이제나흐 인문계 고등학교 김나지움의 200년 선후배 사이로, 같은 학교의 정문을 드나들었다. 바흐를 통해 종교개혁 정신에 입각한 개신교 음악이 시작됐으니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스위스 종교개혁가 츠빙글리의 현장을 찾아서

독일 일정을 마치고 스위스 종교개혁의 아버지 츠빙글리를 만나기 위해 취리히로 향했다. 취리히는 아름다운 강과 호수로 둘러싸인, 멋진 경관을 소유한 도시이다. 취리히를 가로지르는 강 건너 츠빙글리와 그의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1504∼1575)가 목회하던 그로스뮌스터교회를 방문했다. 불링거가 사용했다는 목양실과 츠빙글리가 거닐던 길가도 찾았다.

이어 취리히대 신학부를 방문했다. 이 대학은 사각형 정원을 가운데 두고 정사각형 건물로 둘러싸인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츠빙글리 전공자인 역사신학 교수 오피츠를 만나 ‘2019년 스위스 종교개혁 500주년’에 대한 인터뷰를 했다. 오피츠 교수는 과거 한국을 방문해 강의한 인연이 있었다. 그를 통해 츠빙글리의 출생지 빌트하우스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빌트하우스는 취리히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지만, 꼬불꼬불 산길을 타야해서 꽤 시간이 걸렸다. 설상가상으로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다른 곳으로 잘못 안내하는 바람에 츠빙글리의 출생지요 어릴 적 자랐던 고향을 코앞에 두고 헤매야 했다. 위대한 종교개혁가의 생가를 찾지 못하는 내비게이션에 조금 서운했는데, 어렵게 생가에 도착해서도 그 서운함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츠빙글리가 태어난 곳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방치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생가는 조금은 옹색한 터 위에 세워진 통나무집이었다. 그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츠빙글리의 얼굴이 새겨진 1.5m 높이의 석조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마저도 과연 그가 누구인지 알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다소 무섭기까지 했던 산길을 따라 루체른으로 향했다. 츠빙글리의 동역자로 함께 종교개혁을 추진했던 유드(1482∼1542)가 목회했던 곳이다.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탄성을 자아냈다. 맑고 깨끗한 호수와 그 위에 평화롭게 노니는 백로와 물새들, 멋진 예술품 같은 건물들, 가까이 다가와 루체른 시내를 품에 안은 푸른 산들, 그리고 산 정상에서 중턱까지 빙하처럼 하얀 눈이 내려앉은 설산의 자태는 명화의 한 장면처럼 환상적이었다.

일주일 동안 정신없이 종교개혁의 역사적 현장을 머리와 가슴, 그리고 카메라에 담았다. 시차도 잊은 채 독일과 스위스를 2000㎞ 이상을 달렸는데 루체른의 신비한 경치는 모든 여독을 풀기에 충분했다. ‘이 땅에서 천국을 가장 닮은 나라가 스위스다’라고 말했던 신학자 칼 바르트(1886∼1968)의 말을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글·사진 주도홍 교수 (백석대·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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