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1편>] 설교의 ‘역사적 전환’ 이룬 성 마리아 교회 말씀 선포

외부에서 바라본 성 마리아 교회 전경(왼쪽). 교회 내부에는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성화가 여전히 걸려있다. 교회는 최근 새롭게 단장을 마치고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대회를 기다리고 있다.
 
성 마리아 교회 입구에 '루터가 설교하던 교회'라는 안내문이 씌어 있다.
 
주도홍 교수


독일 비텐베르크는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관광 도시이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도시로, 1000년 중세를 종결시키고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갔다. 비텐베르크는 작은 성읍이다. 독일연방의 작센-안할트주에 속한 인구 5만명 소도시로 비텐베르크대는 할레대학교의 분교로 역사적 장소로만 남아 있다. 비텐베르크대는 루터가 신학교수로 섬겼으며 동료 교수 멜란히톤 등과 함께 종교개혁 사상을 모색하고 창출해낸 현장이었다. 아쉽게도 지금의 비텐베르크대는 더 이상 신학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온 때는 1507년이었다. 루터는 스승 요한 폰 슈타우피츠의 안수로 성직자가 된 이후 수도원과 함께 건물을 썼던 비텐베르크대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루터가 어떻게 비텐베르크대에서 신학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비텐베르크대는 16세기 당시 신진 대학으로 다른 어떤 대학들보다 인문주의에 열려 있는 근대적 대학이었다는 점이다. 공부에 탁월했던 루터는 1508년부터 도덕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성경 과목을 강의했다. 1512년 그는 성경을 “신실하게 설교하고 가르치겠다”는 서약을 하며 그 유명한 성(城)교회에서 작센주의 성주 프리드리히 현공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 마리아 교회의 설교자 루터

신학박사 루터가 평생 성경 강해자로 설교했던 교회는 비텐베르크시 중심부의 성 마리아 교회이다. 이곳에서 루터는 비텐베르크대의 선생 슈타우피츠의 추천으로 1514년부터 154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말씀 선포자로서 사명을 다했다. 루터는 이 교회에서 주일 오전에는 복음서를, 오후에는 서신서와 다른 성경을 본문으로 설교했고, 종교개혁 정신에 입각해 교리문답 가르치기를 잊지 않았다. 1533년부터는 비텐베르크대 동료 교수 요한네스 부겐하겐과 함께 설교 사역을 감당했다.

루터는 개신교의 아버지로서 여러 곳에서 부름을 받아 설교했다. 현재 그 설교지는 역사적 현장으로 보존돼 있다. 종교개혁의 설교 이해는 중세 교회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루터는 설교를 성경의 해석으로, 설교자는 성경을 전하는 부름 받은 자로 이해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개혁은 설교에 있어서 역사적 전환을 가져왔다.

중세에는 철학적이며 논리적인 스콜라주의의 난해함이 설교 내용의 주류를 이루었고 성경은 일종의 텍스트 수준으로 전락되어 이해됐다. 중세 교회가 성경을 일종의 참고문헌 정도로 여겼으니 성경적 교회는 성립될 수 없었고 로마 교황청의 뜻대로 움직이는 로마 교회로 존재할 뿐이었다.

이에 반해 루터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쳤는데, 로마 교회가 교황의 뜻에 따라 성경과 동일한 위치에 두었던 다른 모든 것을 거부하고 성경만이 진리의 척도라고 선언했다. 성 마리아 교회는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의 어머니 교회와 같다. 루터는 성 마리아 교회에서 지금까지 라틴어로 행해지던 교회 미사를 처음으로 독일어로 드렸으며, 빵과 포도주 성찬을 ‘처음으로’ 성도들에게 분배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실행하는 첫 번째 교회였던 셈이다.

종교개혁의 화상 논쟁

성 마리아 교회는 종교개혁사에서 성화(聖畵) 문제로도 유명하다. 비텐베르크대 교수였던 안드레아스 칼슈타트가 이 일을 주도했다.

당시 루터는 보름스의회에서 목숨을 건 ‘오직 성경’ 선언 이후 작센의 성주 프리드리히 현공의 도움으로 피신,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성경을 번역하고 있었다. 루터에게 있어 종교개혁 이론을 실현하기 위해 가야 할 길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 조심스러웠으며 험난하기까지 했다. 특히 화상 문제가 그랬다.

비텐베르크는 루터가 보름스에 피신해 있는 사이 1522년 1월 24일 칼슈타트 주도 하에 ‘비텐베르크 규례’를 반포했는데, 비텐베르크시가 어떻게 종교개혁을 구체화할 것인가를 규정하는 내용이었다. 규례는 예배 형식과 교회 재정의 근간을 새롭게 형성하는 내용이었다. 비텐베르크 규례는 총 17항으로 제13항은 예배당 안에 있는 그림들과 제단들을 제거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미신을 멀리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에는 마리아와 성인들의 모든 화상들이 포함됐다.

비텐베르크시는 성화 문제로 일대 혼란에 빠졌다. 예배당과 강단에 걸려 있던 화상들이 제거되면서 교인들은 혼란에 빠졌고, 시민들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1522년 초 칼슈타트는 ‘성화 제거에 관하여’라는 글을 써서 교인들을 설득했지만 충분하지 못했다. 루터도 칼슈타트의 글에 동의할 수 없었다. 루터는 개혁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긍정했지만 어떻게 개혁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입장을 달리했다. 루터는 먼저 마음에서 화상을 제거할 것이며, 그 다음에 상황에 따라 천천히 제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칼슈타트는 루터의 입장에 동의도, 이해도 할 수 없었다. 칼슈타트는 1524년 자신의 글에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들로부터 그러한 해롭고 거짓된 것들을 제거해야 하고, 그들이 소리쳐 울고 놀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둘 필요 없이 그들의 손에서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태도야말로 올바른 최고의 형제애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에 루터는 칼슈타트를 향해 “광신적 선지자요, 사랑이 없는 사람이요, 그림 혼란자”라고 비판했다.

이로 인해 칼슈타트는 루터와 하나가 될 수 없었고, 루터의 대적자로 바뀌었다. 칼슈타트는 더 이상 비텐베르크에 거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스위스로 피신, 자신과 뜻이 맞는 재세례파와 함께 살면서 성직자와 교수로서 스위스 바젤에서 활동했다.

한국교회와 종교개혁

오늘 한국교회는 제2의 종교개혁을 외치고 있다. ‘개혁된 교회는 지금도 개혁되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표어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명백하고 거대한 죄악을 목격하면서도 사랑과 공의 사이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있다. 개혁의 대상과 인물들을 목격하면서도 허물을 용서하고 덮자는 자세로 개혁 의지마저 접고 그들 편에 서고 있다. 사랑을 핑계로 공의를 포기하는 교회가 되고 있는 것이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 마리아 교회에서 바른 설교자로 살았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실행으로 쉽지 않은 길을 가야만 했다. 사실 화상 제거 문제는 루터의 종교개혁뿐 아니라 초대교회에서부터 거대한 숙제였다. 그럼에도 루터와 칼슈타트는 한 가지는 분명하게 뜻을 같이했다. 잘못은 어떻게든 개혁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개혁에로의 일치. 그들은 아쉽게도 개혁의 방법에서는 하나가 되지 못했다.

21세기 한국교회의 본질적 문제는 개혁의 방법이 다르기는커녕 보다 근본적인 자각과 개혁으로의 일치도 어렵다는 사실이다. 만약 한국교회가 지금 종교개혁을 원한다면 최소한 한국교회의 타락을 겸손하게 인정한 다음 개혁의 일치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글·사진=주도홍 교수(백석대·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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