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1편>]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師弟이자 동역자로 영감 주고받아

멜란히톤은 루터의 사상을 집대성했던 제자이자 동료였다. 루터가 열정적이며 서민적이었던 것에 비해 멜란히톤은 마르고 예민했고 온화했다. 멜란히톤의 초상화와 비텐베르크 생가의 서재 모습.
 
멜란히톤의 생가 전경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최대 업적이자, 그가 종교개혁자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는 직접 번역한 독일어 성경을 신자들의 손에 가져다 준 것이다. 중세교회는 소위 ‘거룩한 언어’인 히브리어, 헬라어 그리고 라틴어로만 하나님의 사상을 담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성경을 일반 언어로 번역하면 신성 모독죄로 여겨 사형에 처했다. 영어로 성경을 번역해 화형을 당한 윌리엄 틴데일이 대표적이다. 중세교회의 표준 성경은 4세기 제롬이 번역한 ‘불가타(Vulgata)’ 라틴어 성경이었다. 중세교회에서 이 성경을 읽는 사람은 신학자와 성직자뿐이었다. 중세교회는 ‘거룩한 것을 개와 돼지에게 줄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여기에 동의할 수 없었다.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신자는 차별 없이 하나님 앞에 선 자유자로서, 진리를 따라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그들의 일상 언어로 직접 읽고 해석하며 그들이 이해한 말씀을 따라 성숙을 도모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 앞에 선 구원받은 자유자로, 그리고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아갈 것을 요청하면서 기독교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루터의 사상을 정리한 멜란히톤

루터의 독일어 성경 출간은 애초에 제안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동역자 필립 멜란히톤(1497∼1560)이다. 멜란히톤은 1521년 첫 개신교 교의신학서인 ‘신학총론’을 펴내 루터의 신학과 사상을 정리했다. 당시 그는 24세였다. 1530년에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내놓았다. 이 신앙고백은 오늘날에도 루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을 때 고백해야 하는 문서이다. 멜란히톤이야말로 루터교회 신앙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다.

사실 루터는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뱅의 ‘기독교강요’(1536년)처럼 두껍고 깊이 있는 역작을 오랜 시간에 걸쳐 집필할 여유가 없었다. 대신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내는 일에 힘썼다. 루터는 1522년 ‘구월 신약성경’을 시작으로 1534년 ‘신구약전서’를 펴내는 등 총 344종의 독일어 성경을 세상에 내놓았다. 루터야말로 ‘한 권의 책의 사람’이었다. 이 루터 성경이 근대 독일어를 새롭게 정립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에 가면 중요한 역사적 현장들을 만나게 된다. 가장 먼저는 루터의 생가요, 그 다음이 멜란히톤이 살았던 집이다. 도시의 입구에 루터의 집이, 그리고 조금 떨어진 길에 멜란히톤의 가옥이 있다. 이들 집의 지척 거리에 두 사람이 활약했던 비텐베르크대학교가 있다.

두 사람의 집은 현재 역사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는데 루터의 집이 멜란히톤의 집보다는 웅장하고 규모가 더 크다. 멜란히톤의 집은 아담하고 예쁜 전통 가옥이다. 루터의 집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열리는 미국 전시회 때문에 오는 9월부터 내년 3월까지는 방문객을 받지 않는다. 이 집은 성주 프리드리히 현공이 루터에게 제공한 사택이었으며, 3층으로 이루어진 멜란히톤의 집은 의사였던 처남의 도움을 받아 개인이 구입한 사유재산이었다.

멜란히톤은 비텐베르크에 온 지 2년 후인 1520년 시장의 딸 카타리나와 결혼한 후 이곳으로 이사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집은 지난 수백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전통미를 유지하고 있었다. 창문은 후기 고딕양식이며 둥글게 굽어지는 계단은 르네상스의 근대성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멜란히톤이 처음 비텐베르크에 왔을 때 그가 받은 도시의 인상은 작은 성읍이라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나는 나의 모국처럼 이곳을 사랑한다. 이곳에서 나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을 만났으며, 그들과 긴밀한 유대관계 가운데 일하게 됐다”고 감사를 잊지 않았다.

루터 출생 500주년이 되는 1983년 당시 동독은 ‘인문주의자’ 멜란히톤의 집을 전시 목적으로 수리했다. 그러다 통일 이후인 97년 멜란히톤 출생 500주년이 됐을 때 그가 강조했던 ‘원전으로 돌아가자(ad fontes)’를 로고로 내걸고 박물관으로 꾸며 방문객을 받았다. 오늘날처럼 본격적으로 방문객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12년부터였다. 마침 지난해 정원 공사까지 마무리 됐으니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볼 수 있겠다.

비텐베르크에서 신학자가 되다

멜란히톤이 루터를 알게 된 것은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였다. 그해 비텐베르크로 옮겨온 멜란히톤은 루터의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에 따라가 힘을 보탰으니 참으로 놀랍다 할 것이다. 1517년 루터가 면죄부 반박 95조를 통해 교회개혁을 외쳤을 때, 루터는 멜란히톤을 교회개혁을 위한 교육개혁의 적임자로 생각했다. 멜란히톤은 루터의 가까운 이웃이면서 루터의 제자요 동역자였다. 또 후계자로서의 역할을 신실하게 담당했다.

멜란히톤은 종교개혁 이듬해인 1518년 비텐베르크대학교에 왔다. 당시 21세였던 그는 루터 편에 서서 헬라어와 성경신학을 가르쳤다. 멜란히톤은 13세가 되기 전 하이델베르크대학에 들어가 헬라어를 공부해 14세에 학사 학위를 받았고 튀빙겐대로 옮겨 17세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런 그가 비텐베르크대로 온 것은 당대 최고의 지성 중 한 명이었던 로이힐린이 성주 프리드리히 현공에게 추천하면서다.

비텐베르크대는 1518년 봄 종교개혁을 지지하며 헬라어 과목을 신설했다. 신학에 관심을 가졌던 멜란히톤은 루터보다 14세 연하였는데도 금세 우의를 쌓았고 루터의 독려로 1519년 9월 성경학 학사를 취득했다. 멜란히톤은 1519년 로마서 강의를 시작했는데 이 강의는 루터가 1515년부터 가르치던 과목이었다. 멜란히톤은 로마서 강의를 위해 루터의 강의 노트를 참고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멜란히톤은 1519년 ‘로마서 신학 개론’을 출간했다.

“나는 루터로부터 복음을 배웠다”

멜란히톤은 1540년 “나는 루터로부터 복음을 배웠다”고 고백했다. 본래 언어학자이며 철학자, 인문주의자였던 멜란히톤은 비텐베르크에서 신학자, 교의신학자가 됐다. 게다가 ‘독일의 선생’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위대한 교육학자로서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독일 교과서의 저자가 됐으며, 새로운 라틴어 시인으로까지 활약했다. 멜란히톤은 루터와 함께 비텐베르크대를 유럽에서 가장 의미 있는 대학으로서 정상에 오르게 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개혁의 방법뿐 아니라 성격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루터가 열정적이며 살이 찌고 종종 시끄럽고 서민적이었던 것에 반해, 멜란히톤은 마르고 예민하고 쉽게 상처를 입는 편이었으며 온화했다. 멜란히톤의 이러한 성격을 루터는 답답해하며 못마땅해 하기도 했는데, 반대로 멜란히톤은 루터의 강한 성격 때문에 힘들어 했다. 그러나 이들은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서로를 보완해 갔으니 하나님의 은혜였다 할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루터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받는 독일어 성경은 이를 위한 멜란히톤의 아이디어와 탁월한 헬라어 실력을 통한 감수가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글·사진 주도홍 교수 (백석대·역사신학)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