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1편>] 성경만이 진리이며 구원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써 얻는다

마르틴 루터가 1539년 설교했다는 독일 라이프치히 토마스교회와 음악가 바흐의 동상. 바흐는 200년 뒤 이 교회에서 주일마다 새 노래로 찬양했다(왼쪽). 초현대적 건물로 변한 라이프치히대학교 전경.
 
플라이센부르크 성 터에 세워진 라이프치히 시청 모습.
 
주도홍 교수


'오직 성경을 통하여'는 종교개혁의 중심 모토였다. 이는 하나님이 종교개혁에 내리신 거대한 선물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스콜라주의 신학에 젖은 중세교회의 아들이자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신실한 수도사였던 마르틴 루터가 '오직 성경을 통하여'를 내세웠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놀랍다. 어떻게 루터에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

아쉬운 점은 오늘날 루터교회 신앙고백의 성경해석 원리로까지 나아간 이 외침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만큼 성경을 중요하게 여겼다든지, 루터는 철학보다 성경적 지식이 위대하다고 여겼다든지 하는 일반 상식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역사적 이해가 뒤따라야 비로소 그 의미가 선명해지고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감동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오직 성경을 통하여’는 라틴어로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인데, 우선 솔라(Sola)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솔라는 ‘하나의’ 또는 ‘유일한’이라는 뜻이다. 다른 여타의 것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솔라 스크립투라는 ‘성경만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문자적 번역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꼭 번역한다면 ‘오직 성경을 통하여’가 바람직하다.

중세교회의 성경관

중세교회에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여럿이었다. 그 길들을 가르쳐주는 것들 역시 여럿이었는데, 성경은 그들 중 하나였다. 교황의 칙령, 공회의 결정은 성경의 권위와 다르지 않았다. 이를 근거로 중세교회는 결정했다. 그들은 구원을 향한 진리를 성경만이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신의 대리자인 교황을 통해서도 가르쳐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믿음만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다른 길이 가능했다. 면죄부를 사거나 십자군전쟁에 참여할 때, 또는 선행을 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중세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그렇게 선언했고, 교회법으로 이를 규정했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교황권이나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성경 어디에도 교황과 지상 교회에 그러한 권한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직 성경’이 말하는 대로 교회는 구원의 진리를 선포해야 하며, 그 진리대로 구원을 순수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 외에 다른 길은 없고, 다른 길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이단이며 적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개혁자 루터는 ‘오직 성경’과 ‘오직 믿음’을 주장하며, 성경의 위치에 세워진 여타의 것이나 성경 외에 가르쳐지는 것들을 비 진리로 정죄했다.

루터가 어떤 상황에서 역사적으로 ‘오직 성경을 통하여’를 외치고 내세웠는지를 알아보면 이를 더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 1521년 ‘보름스 논쟁’은 루터를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보내 중세표준 성경인 라틴어 불가타(Vulgata) 성경을 1522년 독일어 성경으로 바꾸는 역사적 대변혁을 성취하게 했다.

혹자는 루터가 1520년에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글 ‘기독교인의 자유’에서 ‘오직 성경을 통하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루터는 중세 로마교회와 신학논쟁을 하면서 교회의 전통이나 인본주의적 기준에 대적할 때 ‘오직 성경을 통하여’라는 말을 사용했다.

중세 후기 교회는 성경을 네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특이한 해석의 다양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실상은 성경과 전혀 상관없는 교회의 관습들과 교리들만 양산했다. 면죄부가 대표적이었다. 루터는 중세교회 성경 해석의 모호함과는 반대로 명료성을 내세웠다. 성령을 통한 외적 명료성과 내적 명료성이었다.

라이프치히 논쟁

종교개혁이 시작된 바로 이듬해인 1518년 루터의 ‘솔라 스크립투라’는 로마교회의 추기경 요한 에크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에크는 무오설과 함께 교황과 공회의 권위를 주장했다. 이에 루터는 성경 그 어디에도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에크는 교황의 수위권에 관한 글을 세상에 내놓았다. 결국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6일까지 라이프치히 플라이센부르크에서 신학논쟁이 진행됐다.

지금은 라이프치히 시청이 자리한 이 성에서의 역사적 신학논쟁은 라이프치히대학이 주관했으며, 작센의 게오르그공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졌다. 종교개혁 측 인사로는 루터와 칼슈타트, 멜란히톤이 참석했다. 페투르스 모젤라누스의 개회사는 어떻게든 두 편의 입장을 중재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그러나 라이프치히 논쟁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신앙문제에 있어 교황과 공회가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는 에크의 입장에 루터는 반대했다. 토론이 한창일 때 루터는 콘스탄츠공의회(1415)가 정죄하고 화형에 처한 전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모든 주장들을 이단으로 정죄한 것은 오류였다고 반박했다. 후스의 주장이야말로 참으로 그리스도적이며 복음적이라고 루터는 강조했다. 루터의 이 주장이야말로 전대미문의 주장이었다.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던 공작 게오르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흥분을 금치 못했다. 루터는 로마교회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야 했다.

보름스 논쟁

황제 칼 5세에 의해 1521년 1월 27일 소집된 보름스제국의회는 당시 국정을 책임지고 있던 선제후와 제후들 그리고 시의원들이 대거 참석한 거대한 회합이었다. 의제는 제국을 어렵게 하는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을 위시한 여러 정치적 문제들을 다루는 것과 루터를 정죄하는 것이었다.

교황 측 히에로니무스 알렉산더는 2월 13일 루터에게 대적하는 조치를 취할 것을 의회에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보름스 시민들은 루터에 동조했고, 로마교회를 비판하는 울리히 폰 후텐의 글들이 퍼져갔다. 루터의 심문은 4월 17일과 18일에 이뤄졌다. 루터는 이미 이단으로 정죄돼 파문을 당했지만 심문은 필요했다. 루터는 지금까지 기록하고 말했던 것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황제 칼 5세 앞에서 그 유명한 발언을 했다.

“나는 성경의 증거와 명료한 이성적 근거에 의하지 않고서는 무수히 오류를 범하고, 자가당착 모순을 범한 교황도 공회도 믿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나를 사로잡은 ‘오직 성경을 통하여’ 양심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말씀에 포로됐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글 중 아무 것도 뒤집을 수 없다. 양심에 반해 그 무엇을 한다는 것은 완전한 것도 거룩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1521년 5월 4일, 루터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가족이 기다리는 비텐베르크로 향했다. 이때 제국의회에 함께했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공은 루터를 보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군인들을 풀어 루터를 깊은 산속에 위치한 자신의 성 바르트부르크로 피신시켰다.

글·사진=주도홍 교수(백석대·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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