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1편>] 제골방에 은신 모든 크리스천 손에 들려줄 ‘독일어 성경 번역’

마르틴 루터가 은신했던 바르트부르크 성 모습.
 
루터가 성경을 번역했던 방의 책상과 의자로 이 방은 현재 수리중이다.
 
루터의 방으로 향하는 성문.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는 바르트부르크 성은 깊은 숲 속 정상에 우뚝 솟아 있었다. 마르틴 루터가 10개월 동안 피신했던 현장이다. 성 위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세상이 한눈에 들어올 만큼 전망이 좋았다. 루터는 이곳에서 성경번역을 시작했고 그로 인해 종교개혁자가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여행자들이 성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은 루터가 성경을 번역했다는 골방이다. 하지만 안내자 없이 그가 은신했던 방을 찾기란 쉽지 않다. 금방 끝날 것 같은 미로가 끝없이 이어지면서 방향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바르트부르크 성은 입구부터 삼중문으로 돼 있었다. 삼중문 중 하나는 다리로 연결이 돼 있는데, 묵중한 문을 올리면 바로 낭떠러지다. 그 낭떠러지를 통과해도 문은 쉽게 열릴 수 없었다. 철통같이 방어한다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요새 중 요새였다. 성에 들어와도 루터의 방을 찾는다는 것 역시 수수께끼였다.

루터는 바로 이곳에서 고독과 싸우며 진리를 위한 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루터가 작곡해 불렀다는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현장이기도 하다. 1521년 반포된 ‘보름스 칙령’으로 누구든 루터를 죽일 수 있었다. 루터는 살해 위기 속에서 이 찬송을 불렀다.

이런 바르트부르크 성에 서면 누구든 가슴이 뭉클해질 것이다. 30대에 불과한 종교개혁자 루터의 고독과 한(恨), 환호와 열정, 기도와 찬송이 묻어 있었다.

루터의 고독은 죽음의 위기 가운데 가족을 떠나 홀로 이 성의 작은 방에 숨어 살아야만 했던 것을 뜻한다. 그의 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진리를 외쳤건만 그를 따른 것은 죽음의 위기였다는 말이다. 환호란 위기 가운데서도 ‘9월 성경’이라는 종교개혁 최대의 업적을 이뤘다는 것이며, 열정이란 344종에 달하는 ‘루터 성경’을 향해 중단할 줄 몰랐던 그의 뜨거운 가슴이 계속해서 타올랐던 현장이란 의미다.

기도란 이곳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기도 없이는 견딜 수 없는 영적 전쟁터였다는 말이며, 찬송이란 루터가 상상할 수 없는 생명의 위기와 불안 그리고 아픔 가운데서도 한숨을 찬송으로 바꾸어낸 역사적 현장이라는 뜻이다. 찬송가 585장은 루터의 작곡과 작사로 명기돼 있다. 찬송을 부르면 루터의 심정이 되살아나며 더 힘차게 기도하듯 찬송하게 된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아멘”

보름스 칙령으로 살해 위협

‘보름스 칙령’은 1521년 5월 8일로 표기되고 5월 26일 황제 칼 5세에 의해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공포됐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루터를 옹호하지 말 것, 그에게 숙식을 제공하지 말 것, 그의 글을 읽거나 인쇄하지 말 것, 그를 체포할 것, 황제에게 넘겨줄 것 등이 내용이었다.

결국 법의 보호를 벗어난 루터의 목숨은 언제든 그 누구에 의해서든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많은 논란이 일었으나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공에게 한 약속을 따라 칼 5세는 21일 간 루터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했다. 종교개혁에 의해 제국의 일치가 어렵게 되자 칼 5세는 후일 그 약속을 후회했다고 한다. 앞서 5월 4일 저녁, 루터가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던 중 바드 리벤슈타인의 알텐슈타인 성에 가까이 왔을 때,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공이 비밀리에 보낸 군인들이 루터를 납치해 바르트부르크 성에 구금했다. 위험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루터는 1521년 5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농노로 변신,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가명을 사용하고 변장까지 한 채 머물렀다. 이 기간에 루터는 중세교회의 마리아 경건을 어떻게 복음적으로 바꿀 것인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했으며 복음적 교회생활의 근본을 형성하려고 애썼다. 그는 일정한 형태로 형성된 ‘설교문’을 배포해 복음적 설교 문화를 지향했다. ‘수도자의 서원에 관하여’라는 책자를 통해서는 행위에 근거한 수도자 서원을 성경에 위배된 것으로 정죄했다. 수도자가 되어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은 가정을 이루어 소명에 따라 직업을 갖고 각자 부름 받은 영역에서 크리스천의 과업을 이루어가야 함에 모순된다는 것이었다. 루터는 결국 이 책자로 수도원에서 탈퇴 당했고 형법에 따라 처벌을 받기도 했다.

독일어 성경 번역의 표준 되다

루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독일어 성경 번역이다. 이 일은 동료 멜란히톤의 권고에 의해 시작됐다. 1521년 가을부터 1522년 3월 1일까지 11주 동안 루터는 신약성경을 번역했다. 그때 루터가 앞에 두고 독일어 번역에 사용한 성경 텍스트는 에라스무스의 ‘헬라어성경’과 몇몇 라틴어 성경, 중세 표준 성경인 ‘불가타 성경’이었다. 1522년 9월 처음으로 독일어 ‘9월 성경’이 출간됐으며, 1523년 구약 일부가 세상에 나왔다. 1525년까지 구약과 신약이 함께 나온 판이 22개였고, 이를 다시 찍어낸 횟수는 100회였다.

1534년에 이르러서야 여러 종교개혁자들과 동료 교수들의 힘을 합쳐 완역한 독일어 신구약전서 ‘루터 성경’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이 성경은 평민들도 읽을 수 있는 쉬운 독일어로 번역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루터 성경’은 헬라어 구약 성경 ‘칠십인역’을 번역해 낸 ‘불가타’와 달리, 히브리어 구약 텍스트와 헬라어 신약 원문으로부터 가능한 한 독일어로 직역한 것이었다.

루터는 문자적 직역을 시도했다. 힘 있고 그림이 충분히 그려지며, 더 서민적이고 쉽게 이해 가능한 표현들을 사용했다. 독일어 번역에는 남북의 방언이 함께 섞인 중동부의 독일어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루터 성경’이야말로 오랫동안 독일어 성경번역의 표준이 됐으며, 표준 독일어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루터의 수많은 독일어 ‘창조’는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피의 돈’ ‘피의 세례’ ‘자아 부정’ ‘능력의 언어’ ‘등을 물어뜯는 자’ 등이 그렇다. ‘루터 성경’의 개정판은 1984년 발간됐으며, 많은 작곡자들이 이 성경으로부터 교회 합창과 칸타타 등의 가사를 차용했다. 루터는 이 성경을 모든 크리스천들의 손에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스스로 읽고 은혜를 받아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책무를 다할 것을 선언했다.

글·사진 주도홍 교수 (백석대·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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