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1편>] 진리 위해 얼음장같이 힘든 삶… 민주 시민사회 통로 되다

1483년 11월 11일 루터가 세례를 받은 성베드로바울교회 예배당 내부. 루터의 세례를 기념해 조성한 '세례 우물'이 보인다.
 
위는 독일교회연합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그린 루터의 초상화. 아래는 사망한 루터의 얼굴.



마르틴 루터는 독일 동부 아이스레벤에서 1483년 11월 10일 태어나 여행 중이던 1546년 2월 18일 그곳에서 별세했다.

아이스레벤은 비텐베르크와 함께 1996년부터 '루터의 도시'로 불리게 됐으며 역시 비텐베르크와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아이스레벤은 독일어 '아이스(Eis)'와 '레벤(Leben)'의 합성어로 직역하면 '얼음 일생'이다.

묘하게도 루터의 생애가 오버랩 된다.

루터는 중세교회에 맞서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얼음장 같이 차갑고 힘든 일생을 보내지 않았던가.

물론 역사는 그를 화려하게, 때로는 위대하게 기록하고 기억하지만 그의 일생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루터의 생애가 스며 있는 곳, 아이스레벤

아이스레벤에 가면 루터가 태어난 집과 마지막 숨을 거둔 집, 그리고 루터가 유아세례를 받은 성베드로바울교회가 방문객을 기다린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인구 2만5000명의 소도시 아이스레벤은 구 동독의 공산 시절을 벗어난 지 26년이 지나서인지 동양에서 온 외국인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부드럽고 따뜻했다. 시청 광장 한 편의 독일 식당에 들렀을 때 손님이나 종업원들이 친절하게 인사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미소를 지으며 동양인을 맞아 주었다. 외국인이 드문 편이어서 그런지 이들은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독일 음식은 대체로 짠 편인데 이곳 음식도 다르지 않았다.

식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루터의 출생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이 표지판을 따라 걸어갔다. 루터가 태어난 집은 전형적 독일식 가옥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한쪽은 현대식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었고, 다른 한 편엔 루터가 태어났다는 옛 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대식 박물관과 옛 집에서 조화와 긴장을 동시에 느꼈다.

루터가 출생한 집은 이미 530여년이 흘러 아쉽게도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17세기 말부터 루터기념박물관으로 꾸며져 찾아오는 순례자들을 맞았다. 그곳은 루터의 역사적 가계를 보여주면서 중세의 경건과 영성을, 그리고 루터의 세례를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역사적 깊이로 볼 때 박물관은 너무 빈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집은 여러 주인들의 손을 거쳤고, 화재 등으로 파손되기도 했다. 다행히 시에서 루터의 출생지를 기억하고 가옥을 사들여 꾸며놓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아쉬웠다. 그토록 꼼꼼하다는 독일인들이 위대한 종교개혁자의 유적지를 더 잘 보존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특히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는 역사적 고증과 상상을 동원해 복원한 루터 생가는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어쨌든 아이스레벤에서 루터의 역사를 보여주는 가장 의미 있는 현장이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가장 의미 있는 유물은 루터가 1518년 세례를 받았다는 세례대로 박물관 1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루터는 떠났으나 여전히 살아있다

이곳을 벗어나 도보로 몇 분을 걸으면 루터가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성베드로바울교회가 옛 자태를 드러낸다. 태어난 후 처음 교회 나오는 날 유아세례를 베푸는 당시의 관례에 따라 갓난아기 루터는 출생 이튿날인 1483년 11월 11일 세례를 받았다. 이 교회는 현재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기 위해 내부를 현대식으로 꾸몄다.

교회 내부에는 물이 동(動)하는 매우 특이한 예쁜 우물이 있었다. 예배당 강대상 바로 아래를 파서 지름 2m 크기의 대리석 둘레에 못을 만들어 그곳에서 세례를 베푼다. 물론 이는 루터의 세례를 기억하게 하기 위해 고안한 ‘세례 우물’이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의미 있는 상징인 세례를 보여주는 예배당이기도 하다. 100여명 정도가 앉을 만한 예술적 원목으로 꾸며진 교회는 그 자체가 예술품이었다. 그래서인지 예배당에 들어가는 입장료와 함께 사진촬영 요금을 받고 있었다. 교회는 영국에서 신학을 공부했다는 여성 목회자가 담임이었고, 주일에는 관광객을 포함해 70명 정도가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루터가 유아세례를 받은 예쁜 예배당에서 주일예배를 드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를 상상했다.

루터는 생애동안 여러 차례 아이스레벤을 찾았으며, 그의 마지막 여행지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집은 1726년부터 기억되기 시작했다. 루터가 사망한 집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그의 죽음을 기억하는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은 루터를 기억하려는 순례자들에게 ‘루터의 마지막 여정’이라는 주제로 아이스레벤에서의 마지막 날들을 그림과 글로 설명하고 있다. 박물관 전시의 정점은 루터가 숨을 거둔 침실과 루터의 관을 쌌던 천이다.

선제후(選帝侯) 요한 프리드리히 공은 루터의 시신을 비텐베르크로 옮겨오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가 숨을 거둔 이틀 후인 1546년 2월 20일 아이스레벤을 출발해 할레, 비터펠트, 켐베르크를 거쳐 2월 22일 비텐베르크에 도착했다. 장례식은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루터의 파란만장한 63년 일생은 그렇게 무대 뒤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의 말과 글들은 우리 곁에서 머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움직인다. “그는 죽었으나, 살아있다!”

500주년을 기대하며

독일교회가 이번 종교개혁 500주년 잔치에 거는 기대는 특별하다. 10년 전부터 주제를 정해 기념 잔치를 준비해온 독일교회연합(EKD)이 제시하는 요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로 시작한다. ‘오직 성경’에 근거한 종교개혁의 취지를 잘 살려냈다.

2009년의 주제였던 ‘종교개혁과 신앙고백’은 종교개혁이 독일을 뛰어넘어 모든 유럽으로 번졌으며 특히 스위스에서는 개혁교회의 창시자인 장 칼뱅에 의해 받아들여져 하나의 신앙고백이 형성됐음을 의미한다.

‘종교개혁과 교육’은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표준 독일어를 형성했는데, 이로써 차별이 없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교육이 가능하게 됐다는 뜻이다. ‘종교개혁과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숙고를 통해 종교개혁은 하나님 앞에 선 자유자인 인간의 존엄에 관심을 쏟게 됐다는 취지다. 진정한 자유에 뿌리를 둔 세계관, 개개인의 자유로부터 출발하는 양심의 자유를 따라 국가와 교회, 그리고 사회를 함께 이뤄갔던 것이다.

‘종교개혁과 관용’은 함께 어우러져 사는 정신이 빛나는 오늘의 유럽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온갖 고통을 당하며 투쟁했던 종교개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뜻한다. ‘종교개혁과 정치’는 종교개혁이 기독교적 자유의 개념을 형성했고, 국가 정치에 참여하되 순종과 저항 사이를 두고 고민하게 만들면서 민주주의 사회와 참여 시민사회로 가는 시금석이 됐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종교개혁과 그림, 그리고 성경’은 500년 전부터 미디어혁명을 가져온 측면을 조명했다. 루터성경의 보급을 통해 서적의 출판은 새로운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됐고, 크라나흐 같은 위대한 화가는 근대로 나아가는 길에 있어 하나의 새로운 언어세계와 그림 언어를 형성했다. 내년 500주년 행사는 전 세계를 밝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글·사진 주도홍 교수 (백석대·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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