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캡슐 한 알로 간편하게 식사를 해결한다는 상상은 미래 사회를 그린 SF 장르의 오래된 클리셰 중 하나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되고 있기도 하다. 분말 혹은 바 형태의 대체식이 ‘미래형 식사’라는 이름으로 팔리기 시작한 지도 몇 년 됐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행위이며 그 자체로 큰 행복감을 주기도 하지만, 때론 그 과정이 복잡하고 소모적으로 느껴질 뿐이니 성서의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만나’야 말로 인류가 오래도록 꿈꿔온 유토피아적 양식의 원형일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리는 유토피아는 원하는 음식을 아무런 수고도 필요 없이 풍족히 얻는 사회다. ‘스타트렉’에서는 ‘음식복제기’에 말로 간단히 명령만 내리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 ‘백 투 더 퓨처 2’에서 상상한 2015년이라는 미래는 동전만한 모형을 주방기구에 넣으면 몇 초 후 큼지막하고 먹음직스런 피자가 나오는 시대다.
자연이 파괴되고 동식물이 멸종해 인류가 겪는 끔찍한 식량난은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상상의 대표적 이미지다. 그러나 ‘유토피아=풍성한 음식’ ‘디스토피아=굶주림’이라는 공식은 때로 역전되기도 한다. 픽사 애니메이션 ‘월-E’는 거대 독점기업이 부추겨 온 ‘대량소비’ 끝에 결국 쓰레기로 뒤덮여 살 수 없게 된 지구를 떠나 우주선에서 살아가는 미래의 인간상을 보여준다. 풍선처럼 비대해진 인간들은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어 자동으로 움직이는 의자와 도우미 로봇에 의지해 살아가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마셔댄다.
‘매트릭스’에서 그리고 있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도 인공지능의 도구로 전락한 인간은 탯줄처럼 연결된 관을 통해 계속 영양을 공급받으며 기계 안에서 길러진다. 반면, 진실을 깨달은 자들의 유토피아에서는 필수 영양소들만으로 이뤄진 죽 한 그릇이 전부다. 동료들이 죽을 먹을 때 이들을 배신하고 첩자가 되기로 한 사이퍼는 매트릭스 안에서 정부 요원을 만나 고급 스테이크와 와인으로 화려한 식사를 한다. 그 맛과 포만감이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진실을 외면하고픈 그는 말한다. “모르는 게 축복이죠.”
디스토피아의 공포란 빈곤의 고통보다는 오히려 풍요로움, 그리고 그 뒤에 감춰진 비밀에서 기인하는 것일 테다. ‘설국열차’의 꼬리칸에서 단백질 블록으로 연명하는 사람들의 비참함보다는 뒤이어 드러난 식량의 정체가, 머리칸 쪽으로 나아갈수록 펼쳐지는 호화로움이 더욱 충격적인 이유다. 과일과 초밥, 수레에 수북이 쌓인 흰 달걀 등 신선한 음식들의 향연은 영화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를 핵심적으로 요약한다.
살충제 등 인체에 유해한 성분이 남아있는 달걀이 오랫동안 유통돼왔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지면서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조류독감 구제역 등은 더욱 잦아지는 듯하고, 이때마다 보도되는 공장식 사육의 현실은 단백질 블록 혹은 매트릭스의 정체를 발견하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존 버거가 ‘본다는 것의 의미’에서 지적하듯, 산업화로 인해 동물의 시선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잔인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형마트 진열대 너머에서 우리를 향하고 있는 수많은 ‘옥자’들의 눈빛을 마주한 올여름, 디스토피아적 공포와 스릴러는 극장보다 식탁 위에 먼저 다가와 있었다.
여금미 <영화 칼럼니스트·영화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