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언어는 권력구조를 내포한다. 보편적 기준이 되는 중심언어와 주변의 언어, 표준어와 사투리의 관계는 남성과 여성의 언어에도 적용된다. 남성의 신체, 성과 관련된 언어는 거리낌 없이 사용되는 반면 여성의 신체, 성과 관련된 언어는 감히 발화되어선 안 될 부끄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세상의 절반을 차지함에도 여성의 언어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명명하듯 ‘소수어’가 된다.
대부분의 영역에서 그렇듯 영화계 역시 오래 전부터 남성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지난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 활동하는 여성감독의 비율은 고작 5%. 할리우드에서도 7%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소피아 코폴라와 문소리, 두 여성 감독이 소수어로 자아낸 이야기를 나란히 들려주는 요즘 극장가는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지난 6일 개봉한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은 올해 칸에서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토머스 컬리넌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남북전쟁 중 부상 입은 채 탈영한 북군 병사(콜린 패럴)가 남부 여학교 기숙사에 머물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중년의 교장(니콜 키드먼)부터 열 살 남짓 꼬마 소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여성 7명이 생활하는 고립된 공간에서 이방인의 개입으로 생겨나는 긴장과 파국을 여성의 관점으로 흥미롭게 그려낸다. 원작소설이나 돈 시겔 감독이 이미 1971년에 각색한 영화가 ‘청일점’ 남성의 시점을 중심에 둔 것과 비교하면 다른 점이 많다.
프랑스에 시집 온 오스트리아 공주의 비극적 삶을 재해석한 ‘마리 앙투아네트’, 일본에 여행 온 미국 여성의 짧은 로맨스를 그린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등 전작에서도 소수어 사용자로서의 여성 이야기를 독창적으로 다뤄 온 코폴라는 이번 작품에서도 여성의 언어에 초점을 맞췄다. 도입부에서 교사 에드위나(커스틴 던스트)가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장면은 이러한 의도를 핵심적으로 보여준다. 인칭과 격에 따른 동사변화를 외울 때 관습적으로 앞세워지는 3인칭 남성형 ‘그’는 ‘그녀’에게 자리를 내준 채 생략된다. 인공조명 대신 자연광에 의지한 촬영방식 또한 인물들의 대화나 권력관계 변화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한편 배우 문소리가 영화감독으로서 14일부터 극장에서 선보이게 될 ‘여배우는 오늘도’는 올해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영화 중 하나일 것이다. 2014년부터 만들어 온 3편의 단편을 모은 것으로, 연출을 맡은 동시에 카메라 앞에서 ‘배우 문소리’를 연기한다.
여배우 출신으로 뛰어난 감독이 된 사례는 적지 않다. 앞서 얘기한 코폴라도 배우로 먼저 활동을 시작한 경우다. 조디 포스터, 줄리 델피, 아네스 자우이, 한국의 방은진이나 구혜선 등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의 틀 안에서 배우가 일종의 자화상처럼 자신을 그린 경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본명과 실제의 이야기를 허구적 스토리텔링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프랑스 소설가 세르주 두브로브스키가 창안해 낸 ‘오토픽션’과도 맞닿아 있다. 이 독특한 언어적 모험은 촘촘히 배치된 유머와 감동을 통과하며 빛을 발한다. 배우라는 타이틀 뒤에 가려져 있던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라니! 문소리와 수많은 ‘그녀들’의 질주가 계속 이어지길 기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여금미 <영화 칼럼니스트·영화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