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중후반 한국은 기이하게 역동적인 시기였다. 식민지 시대를 지나 6·25전쟁을 경험한 후였고 아직은 본격적으로 근대화와 산업화의 영향 아래 놓이기 전이었으며, 서구문화가 빠르게 유입되던 시간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의 격랑에 가장 급격한 영향을 받은 건 여성들이었다. 한국영화사에서 50년대에 제작된 수많은 멜로드라마들의 특이성은 여성들의 이러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반응한 결과다. 당시 멜로물들에는 한국전쟁의 상흔을 짊어진 여자들이 주로 등장한다. 전쟁 때문에 남편과 사별하고 가장 역할을 해야 하는 과부, 미군부대 주변에서 생계를 꾸려가는 기지촌 여성들,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 성적으로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일명 ‘아프레 걸’(‘전후파(apres-guerre)’에서 나온 신조어). 이 여자들은 신문물과 전통적 가치관 사이에서 위태롭게 분열하면서도 사적인 삶을 향유하며 소비와 쾌락의 주체로서 새로운 성 담론의 중심에 섰다.
일찍이 영화평론가 이영일은 ‘한국영화전사’(1969)를 통해 55년에서 57년에 만들어진 멜로드라마가 “전혀 새로운 정서의 기반 위에서 남녀관계나 가정의 모럴, 부부간의 관계”를 그리며 여성들은 “해방 전의 모럴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주장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확실히 이 시기의 여성들은 다분히 유한 계급적 속성을 지니던 20년대의 ‘모던 걸’들과 다르다. 약화된 아버지의 권위를 다루는 60년대의 가족멜로 속 여성들과도 차이를 갖는다. 50년대의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시대상황이 당대의 여성 일반에게는 오히려 개별적 욕망을 발화하는 활력의 창으로 기능한 셈이다. 그 활력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박남옥의 ‘미망인’(1955)은 이 희귀한 시기의 영화들 중에서도 가장 희귀한 사례로 불러 마땅하다. 박남옥이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이며, 이 영화가 불운하게도 그녀의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미망인’은 유사한 시기에 제작되어 시대의 이슈가 되고 흥행에 성공한 ‘자유부인’(감독 한형모·1956) 같은 여타의 멜로물들과는 다른 길을 간다. 요컨대, 남자들이 연출한 당대 다수의 영화들은 자유분방한 여성 인물들의 행로를 전시한 후, 이들을 가부장제의 질서 안에서 도덕적으로 재편하는 결말로 치닫곤 한다. 여성들은 결국 성적 대상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미망인’은 여자들에 대한 판단을 끝내 유보하는 대신, 이들을 쉽게 해결되지 않는 질문으로 남겨둔다. 이 여성들은 누구인가.
여기, 그런 여자들이 있다. 이신자는 한국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 어린 딸을 키운다. 남편의 친구였던 이성진으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고 있는데, 그는 그녀에게 연정을 품은 것처럼 보인다. 이성진의 아내는 남편과 이신자 사이를 오해하고 자신도 젊은 남자 택과 바람을 피운다. 그러나 택은 어느 날 우연히 바다에 빠진 이신자의 딸을 목격하고 구해준 후, 신자와 사랑에 빠진다. 신자는 택과의 동거에 걸림돌이 되는 딸을 옆집에 사는 홀아비에게 맡겨버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택 앞에는 한국전쟁 때 헤어진 첫사랑 진이 나타나고 그는 신자에게 돌아가지 않기로 한다. 치정관계로 얽혀버린 세 여자들뿐만 아니라, ‘아프레 걸’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젊고 도발적인 여자도 신자의 이웃으로 종종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우리가 예상하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벗어나 있다. 영화는 이들을 가정을 건사하는 아내 혹은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따라 서슴없이 행동하는 개별적인 여자들로 보여주는 데 몰두한다. 이들의 태도에 비한다면 정작 자신은 다른 여인을 마음에 두고서도 아내의 불륜에 대해 “가정의 질서라는 것도 생각해야지”라고 훈계하는 이성진의 점잖음이 가식적으로 보인다. 이런 장면은 어떤가. 영화가 중반에 이르자 같은 식당의 한 방에는 이성진과 이신자가, 다른 방에는 이성진의 아내와 애인 택이 그 사실을 모른 채 술을 마시고 있다. 이성진은 이신자에게 이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치고 이성진의 아내는 택을 유혹하고 있다. 영화는 동시간대 두 방의 장면을 계속 교차시킨다. 지금이라면 억지스러운 막장 드라마라고 할 법한 짝들의 뒤섞임이 여기서는 절묘하고 과감한 편집의 리듬을 통해 세태에 대한 날카롭고 압축적이며 풍자적인 형상화로 읽힌다. 중산층 유부남과 가난한 여자, 돈 많은 유부녀와 궁핍한 젊은 애인의 관계를 결정짓는 권력과 욕망의 여러 층위들이 특별한 대사나 행동 없이도 전달되는 것이다. 결혼제도의 위선은 물론 말할 것도 없다.
이보다 인상적인 장면도 있다. 바닷가에서 이성진의 아내가 애인 택에게 수영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사실 그들은 수영을 빙자로 성적 호기심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변 한 쪽에서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이신자가 물놀이를 하는 딸을 바라보고 있다. 이신자가 근처를 지나던 이웃의 젊은 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딸이 물속으로 사라지는데, 그녀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이때 엄마의 쇼트와 딸의 쇼트는 서로 분리된 시공간에 아무런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나열된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이상하게도 불길하게 느껴지는 파도의 쇼트가 강렬한 인상으로 삽입된다. 택이 이신자의 딸을 구해내기는 하지만, 이 장면 전체는 편집의 리듬이나 인물의 시선에 있어서 내내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다. 딸을 잃을 뻔한 엄마의 조바심이나 안도 같은 감정은 여기 깃들어있지 않다. 그녀의 마음은 지속적으로 어딘지 다른 곳을 향해 있는 것만 같다.
이 장면에 내재된 의아한 차가움은 영화의 후반에서 다시 상기된다. 동거를 하게 된 이신자와 택이 작은 방에 누워있다. 그녀는 딸과 애인이 서로를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남자의 얼굴을 살피는 이신자의 눈빛과 시선의 움직임은 스산하면서도 뜨겁고 교묘한데 이어지는 그녀의 대사는 가히 충격적이다. “쟤, 송서방네 이사 가면 따라 보낼까? 나도 귀찮아.” 하나 뿐인 딸을 옆집 홀아비에게 보내버리겠다는 이 엄마의 마음은 과연 진심일까. 놀랍게도 이후의 장면들에서 저 말은 현실이 된다. 이신자는 이성진이 후원해 준 돈으로 양장점을 차리고 택과는 동거를 하고 있다. 그녀의 딸은 이사 간 송서방의 돌봄을 받으며 따로 산다. 이러한 결정의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망설임도 보지 못한다. 그러니 앞선 바닷가 장면에서 딸이 익사할 뻔한 그 순간의 섬뜩함과 파도소리의 을씨년스러움은 어쩌면 이신자의 무의식 혹은 감춰진 소망을 대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딸의 죽음을 바라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엄마’라는 정체성을 벗어던지고픈 전쟁 과부의 어두운 심연이 그 장면 전체에 담겨있던 건 아닐까. 현재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 심연은 무시무시하고 과격하다. 감독 박남옥이 갓 태어난 딸을 어쩔 수 없이 등에 업고 다니며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일화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이신자의 내면과 선택은 박남옥의 당시 현실과 묘하게 충돌하면서도 서글프게 공명한다.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미망인’은 원본 훼손으로 후반 10여분 사운드가 날아간 상태이며, 결말 부분은 안타깝게도 아예 유실되어 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영화의 마지막은 이신자가 술에 취해 택을 기다리는 모습, 신자를 버리고 첫사랑을 선택한 택이 다시 어딘가를 향해 걷다가 멈춰 선 모습이다. 당시 광고전단을 근거로 이 영화의 결말에서 이신자가 이별을 고하는 택에게 칼을 겨눠 앙갚음을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복원된 영화 안에서 우리가 그 끝을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다만 이런 물음을 던져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왜 ‘미망인’은 50년대 중후반 극장가를 메웠던 그 많은 여성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했을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미망인’에는 대중이 대리만족할 만한 상류층 여성들의 모던한 생활패턴이나 댄스홀 같은 화려한 광경이 없다. 그런 스펙터클은커녕 가난하고 비루하게 헤쳐 나가야 하는 일상만이 있다. 게다가 성적 욕망을 대담하게 드러내는 여성들에 대한 그 어떤 도덕적 단죄도 가해지지 않는다. 대중이 영화 속 여성인물을 통해 잠시 일탈을 경험한 후, 다시 안도하며 가정으로 돌아가게 하는 안전장치 같은 것은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성인물들을 특정 행동으로 이끄는 인위적이거나 극적인 설정도 찾아보기 어렵다. 말하자면 당대의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자신의 욕망을 어느 정도는 숨긴 채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적당한 판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내밀한 욕망과 죄의식을 날카롭게 건드리며 도피할 퇴로를 마련해두지 않은 지독히 건조하고 현실적인 여성 자신의 이야기. 지금의 우리는 무려 육십여년 전의 그 날선 태도에 감탄하지만, 당시의 여성 관객들에게 그것은 자신들의 민낯을 지나치게 선명히 비추는 가혹한 거울이었는지도 모른다.
■ ‘한국영화 첫 여성감독’ 박남옥
투포환·단거리 선수, 기자로 맹활약… 딸 업고 ‘미망인’ 완성
박남옥(1923∼2017·사진)은 단 한편의 영화, ‘미망인’을 남겼을 뿐이지만, 그가 최초의 여성 감독이 될 수 있었던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미망인’을 만들기 전 박남옥의 행보를 들여다보면 그가 다방면에서 얼마나 대담하고 진취적이며 거침없는 인간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박남옥은 1939년부터 41년까지 투포환 한국기록을 보유한 선수로 단거리와 높이뛰기 등의 종목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운동뿐만 아니라 미술과 문학 분야에서도 재능을 발휘했고 이화여전 가정과를 중퇴한 후, ‘대구매일신문’에서 영화평을 쓰며 기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45년, 조선영화사 촬영소에 들어가 ‘자유만세’를 비롯한 다수의 영화들에서 편집을 배우고 스크립터로 활동하며 영화인으로서의 이력을 쌓기 시작했다. 6·25전쟁 중에는 한형모 감독을 따라 국방부 촬영부에 들어가 종군영화를 만들었고 그 무렵 만난 극작가 이보라와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았다. 이보라의 시나리오로 배우 이민자 유계선 이택균 나애심 등과 함께 16㎜ 영화인 ‘미망인’을 찍기 시작했지만, 영화의 후반 작업이 끝날 때까지 지속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배우가 펑크를 내고 날씨로 인해 촬영이 중단되고 제작비가 부족한 상황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박남옥은 아이를 업고 스태프들에게 밥을 해먹이며 결국 영화를 완성했다. 그 노력이 무상하게도 ‘미망인’은 흥행에 처참히 실패했다.
이후 그녀는 잡지 ‘시네마팬’과 출판사 등에서 일을 하다 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노년을 보냈다.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 여성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2001)에는 생전의 박남옥이 등장한다. 이 영화의 감독인 임순례는 2008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한시적으로 마련했던 ‘박남옥 영화상’의 수상자다. 그녀는 생전 박남옥이 아끼던 후배 감독이라고 알려져 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여성감독들을 독려하기 위한 취지로 올해부터 다시 매년 ‘박남옥 영화상’을 시상하기로 했다.
<남다은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