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시대다] 어둡고 슬픈 젊음의 초상… 김기덕의 ‘맨발의 청춘’


 
‘맨발의 청춘’은 1964년 최고 흥행작이다. 당시 큰 액수의 빚을 지고 있던 아카데미극장은 ‘맨발의 청춘’을 개봉한 덕분에 빚을 모두 갚았다고 한다. 필자 제공
 
트위스트 김(왼쪽)은 트위스트 경연대회에서 수상한 뒤 이 영화에 발탁, 일약 스타가 됐다. 필자 제공
 
신성일과 엄앵란은 ‘맨발의 청춘’이 개봉한 이 해에 결혼한다. 결혼식 당일 몰려든 군중으로 인해 인근 교통이 마비될 정도로 둘은 당대의 스타커플이었다. 필자 제공
 
김기덕


일본 영화 ‘진흙투성이의 순정’ 원안
청춘들의 반항·공허함·자학과
순정·혈기·나르시시즘 함께 그려

신성일·엄앵란 커플 내세워 만든
스타시스템 가동된 첫 번째 영화


영화 ‘맨발의 청춘’(1964)에는 사소하지만 괴상한 대목이 한 군데 있다. 젊은 건달 두수(신성일)는 위기의 밤거리에서 대학생 요안나(엄앵란)를 구해준 뒤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한 눈에도 알아차릴만한 신분 차이를 이내 자각하고는 무력함을 느낀다. 평소 알고 지내던 술집 여주인 은혜의 방에서 그녀를 끌어안고는 있지만 내내 요안나를 생각하며 자조에 젖어 있던 두수는 분위기를 바꿔보겠다는 듯이 냉소적이면서도 신경질적으로 별안간 이렇게 묻는다. “뭔가 재밌고 신이 나서 못 견딜만한 놀음 없어?” 그러자 여인이 앞에 놓인 화장대를 급히 두리번거려 작은 핀셋을 집고는 다른 한 쪽 팔을 치켜 올린 뒤 자신의 겨드랑이쪽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두수씨, 이것 좀 뽑아줘요, 자, 어서!” 두수는 건네받은 핀셋을 구석에 던져버리고는 쓸쓸하게 뒤돌아 방을 나선다.

이 황당하고 당혹스럽기까지 한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너무 사소해서인지 아직까지는 이 장면에 관한 진지한 해설은 물론이고 우스갯말조차 개인적으론 접해보질 못했다. 이것은 그저 ‘맨발의 청춘’의 원안이었던 일본영화 ‘진흙투성이의 순정’(1963)에서 무리하게 옮겨온 것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라면 원안을 넘고자 각본과 연출이 더욱 과잉되어지는 과정에서 남겨진 불순한 잉여인가. 혹은 단순하게 보일 뿐 고도로 계획된 익살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선진문화로 인식된 서양문화 혹은 미국문화 애호증을 앞세워 관객을 자극하기 위한 이 영화의 변태적 유혹인가. 무엇보다 1964년 당대의 관객은 이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였던 것일까.

우회적이나마 확연히 상기시키는 사실이 한 가지 있기는 하다. 두수가 원한 ‘재밌고 신이 나서 못 견딜만한 놀음’을 거칠게 ‘향락’이라고 축약해보자. 두수는 자조하고 자학하고 있는데 바로 그 순간에 반발적으로 향락을 찾는다. 두수가 원한 향락과 여인이 제안한 향락의 내용은 서로 달랐으나 그 불일치 자체가 중요한 것 같진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두수의 향락에의 요구가 모종의 절망감 내지는 좌절감과 등을 맞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일군의 ‘청춘영화’ 속 주인공들이야말로 때때로 그러한 종류의 발작적 향락에 젖는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태양족 영화’의 청춘들이 대표적이다.

태양족 영화라는 명명은 이시하라 신타로의 소설 ‘태양의 계절’(1955)과 그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동명 영화에서 유래했다. 전후 일본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위험한 향락의 초상을 소재로 했던 도발적인 사조다. ‘진흙투성이의 순정’은 그 사조 안에 있었고 따라서 이 영화를 원안으로 한 ‘맨발의 청춘’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젊은이들의 반항심, 공허함, 자기연민과 자학, 모종의 패배주의 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순정과 혈기와 나르시시즘 등이 공히 이 사조의 특징인데, ‘맨발의 청춘’도 얼마간 그 점을 공유하고 있다.

다만 동시대 양국 젊은이들의 구체적인 상황은 다소 달랐을 것이다. ‘맨발의 청춘’이 개봉하던 그 해 1964년 이곳의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은 한일협상과 그에 뒤따른 강력한 반대시위들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무력으로 시위를 제압했다. 한편으론 역사에 기록된 살인 재판인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시위의 분위기를 흐리려 했다. 물론 여기엔 대학생 및 많은 젊은이들이 관련되어 있었다. ‘월남군사지원단’ 환송식을 시작으로 베트남 파병이 시작되었고 이듬해부터는 전투병 파병으로까지 이어졌다. 젊은이들 중 누군가는 강제 차출 당했고 누군가는 ‘월남’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정부의 유인에 넘어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배를 탔다.

한편 저 멀리 미국에 상륙한 영국 밴드 비틀즈가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알리던 이 해에 한국에서는 미 8군 가수 출신의 신중현이 이끄는 한국 최초의 록밴드 ‘에드훠’가 ‘빗속의 여인’을 타이틀곡으로 첫 앨범을 냈다. 그리고 영화 쪽에서도 주목할 만한 문화적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맨발의 청춘’이다.

신성일·엄앵란 커플을 내세워 만든 ‘맨발의 청춘’은 스타시스템이 가동된 첫 번째 영화로 기록됐다. 개봉 첫 날 수많은 관객이 몰려들어 조선일보 옆 아카데미 극장에서 덕수궁까지 줄이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이 영화의 관객은 젊은 층이 다수였고 ‘맨발의 청춘’은 그해 흥행 1위의 영화로 등극했다. 영화 속에서 주연 신성일과 조연 트위스트 김이 입었던 의복은 절정의 인기 상품으로 팔려 나갔으며 청춘영화의 붐이 본격적으로 형성됐다. 이후 1960년대 청춘영화의 인기는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무엇이 이 영화를 당대의 흥행작이자 1960년대 청춘 영화의 정점으로 만든 것인가. 많이 언급되어 온 영화 속의 그 열정적이고 세련된 청년 문화의 기호들을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가령 ‘맨발의 청춘’은 트로트 일색이던 한국 영화음악에 반격을 가했다. 인기 작곡가 이봉조가 작곡한 재즈풍 주제가의 선율은 지금 들어도 멋스럽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재즈를 영화음악으로 사용한 것은 ‘맨발의 청춘’이 한국영화 최초라고도 한다. 주제가를 부른 최희준 역시 당시 젊은이들이 선호하던 미국문화의 선두 주자에 속했고 그는 트로트가 아니라 스탠더드 팝을 기본으로 했다. 그는 트로트의 여왕 이미자 전성시대에 균열을 내는 새로운 대중음악인으로 부각됐다.

무엇보다 가장 큰 돌풍을 일으킨 것은 ‘트위스트’라는 이름의 춤이었다. 트위스트 김은 영화 속 두수의 수하인 ‘아가리’라는 역할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그는 영화 속에서 광란의 트위스트를 선보인다. 그런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트위스트 김의 춤 장면은 오늘날의 관객이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과감하다. 남자의 하체 아래로 여자가 바닥에 누워 춤을 추는 몸짓이란 가히 성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면 좋을까. 뭔가 재밌고 신이 나서 못 견디겠는 놀음으로서의 춤, 과장된 향락의 춤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영화 속에서 두수도 한 차례 트위스트를 춘다. 하지만 두수의 트위스트는 트위스트 김의 그것과 다르다. 요안나가 속한 상류사회에 잠시 발을 들였다가 망신을 당하고 돌아온 직후에 두수는 마치 자학하는 것처럼 그 춤을 느리고 힘없이 춘다. 게다가 그때 자신을 찾아온 요안나를 향해 “나는 사회의 암”이라고 소리치며 그녀를 내쫓는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게 맞겠다. 트위스트 김의 트위스트는 전적으로 생생하고 활기찬 문화적 기호이자 순수한 전시로서의 향락이다. 반면에 두수의 트위스트는 ‘절망과 좌절의 드라마’가 인도한 자조적이며 자학적인 몸짓으로서의 향락이다. 두수는 깊은 절망과 좌절에 빠질 때마다 뭔가 재밌고 신이 나서 못 견디겠는 것을 찾고 있지 않은가. 그의 슬픈 향락의 몸짓은 비극적 드라마의 결과다.

그렇다면 그 비극적 드라마의 결정적 요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때 영화의 대답은 줄곧 정해져 있다. 영화는 그 비극이 끝내 이들의 사회적 신분과 계층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시하고 확정하면서 끝맺는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라면 서로의 계층과 신분에 호기심을 느끼는 희극적 장면으로도 꾸며졌던 그런 것이다. 두수가 요안나처럼 주스를 마시며 교양 있게 서양고전음악을 들어보고, 요안나가 두수처럼 침대 위에서 독주를 마시며 ‘권투잡지’를 일별해보는 그 장면이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마침내 비극은 도래한다. 여기 두 개의 장례행렬이 대비를 이룬다. 요안나의 시신은 줄지은 고급 세단에 실려 운구 되지만 두수의 시신은 짚더미에 아무렇게나 덮인 채 허름한 손수레에 실려 있다. 눈 내린 추운 겨울날 두수의 시신은 맨발이다.

이 마지막 장면에 관한 아이러니한 일화가 한 가지 있다. 애초 이 장면은 빈부격차를 과장한다는 이유로 검열관에 의해 삭제될 뻔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당시 이 영화의 개봉관 소유주이자 유력 일간지의 사장이 대통령 박정희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영화를 본 박정희가 문제없다고 허락해주어 지금처럼 상영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1960년대 도시빈민의 문제는 중요한 현안이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사실상 그걸 직접 반영한 셈인데도 당시 대통령의 눈에는 그 점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인가. 게다가 이 일화는 단순히 한국영화사의 명장면이 살아남게 된 기막힌 사연으로만 들리진 않는다. 국가통치권자가 개인적 아량으로 영화 한 편의 편집에 관여하여 장면의 유무까지도 결정해주는 사회라니. 그것이 바로 이 시기 청춘들의 절망과 향락의 몸짓에 관계된 모종의 배후가 아니었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인가.

■ 김기덕
청춘영화 붐 조성… 1960년대 흥행보증수표


김기덕(사진) 감독은 1934년 서울에서 태어나 올해 9월에 별세했다. 교육자 집안의 자손이었고 그 역시 의사가 되는 것이 젊은 시절의 목표였지만 우연한 기회로 훗날 감독이 되었다. 부산 피난 시절에 미 공군부대 통역관으로 일하게 되고 그 시기에 시인 고은, 작가 유두연 등과 교류하면서 문화예술계 쪽으로 발을 넓혔다. ‘불사조의 언덕’(1955)이라는 영화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될 뻔 했다가 대신 연출부 일을 하게 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영화의 길을 걸었다. 전창근 한형모 등 기술 좋은 선배감독들 영화에서 조감독을 지내며 연출 수업을 쌓았다. 데뷔작은 ‘5인의 해병’(1961)이다. 오락적 면모를 갖춘 동시에 작품성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맨발의 청춘’으로는 일약 1960년대 청춘영화 붐을 조성한다. 이후 그 자신이 ‘불타는 청춘’(1966) ‘흑발의 청춘’(1966) ‘맨주먹 청춘’(1967) ‘청춘고백’(1968) ‘청춘을 다 바쳐’(1969)를 내놓으며 청춘영화의 명맥을 이어갔다. 1960년대 영화 산업계에서 일명 흥행보증수표로 불렸다. 청춘영화 외에도 다수 장르에 능했다. 분단을 배경으로 한 심리적 멜로드라마 ‘남과북’(1965), 현미의 동명 주제가로도 유명한 멜로드라마 ‘떠날 때는 말없이’(1964), 희극 시리즈물 중 한 편인 ‘말띠 신부’(1966), 후대 관객들에게 컬트영화로 부각된 한국 공상과학 영화의 대표작 ‘대괴수 용가리’(1967) 등을 만들었다. 그 자신이 야구광으로서 최초의 야구 영화 ‘사나이의 눈물’(1963)과 ‘영광의 9회말’(1977) 등도 연출했다. 1970년대 후반 이후로는 서울예술대학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정한석 영화평론가>

참고문헌: ‘김기덕:60년대 한국 대중장르 영화의 최전선’ ‘한국현대사 산책:1960년대 편 2’ ‘이야기 한국영화사’ ‘한국현대생활문화사:196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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