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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앵글속 세상] 강진 3부자의 손끝, 천년 옹기를 빚다

국가무형문화재 96호 옹기장 정윤석씨가 지난해 10월 전남 강진 봉황마을에 있는 자신의 작업장에서 대형 옹기를 만들고 있다. 질 좋은 찰흙으로 잘 반죽된 넓적한 타래미와 또 다른 타래미가 연결되면 구멍 뚫린 깡통에 숯을 넣은 부드레불을 옹기 안에 집어넣는다. 적당한 온도의 부드레불은 습기를 머금고 있는 아래 타래미를 서서히 말려 위 타래미의 무게를 견딘다. 칠량봉황옹기는 체바퀴 타래미(판뜨기) 기법과 옹기장이 직접 만든 전통 도구를 사용해 만들어진다. 전라도 지역의 옹기는 타 지역에 비해 배가 불룩하고 크다.
 
늦은 밤 3부자가 전통 가마 중간 중간에 열린 창을 통해 나무를 넣고 있다. 불때기의 마지막 과정인 창불때기를 잘해야 옹기에 골고루 윤이 나고 형태도 뒤틀리지 않는다.
 
3부자가 가마에서 꺼낸 옹기를 들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왼쪽부터 정윤석 옹기장과 아들 상균, 영균씨.
 
(1) 찰흙을 발로 밟아 공기를 빼고 불순물을 제거하는 점토작업. (2) 넓적한 직사각형의 타래미를 이어 붙이는 작업. (3) 물레를 돌려가며 나무 도구로 옹기 안과 밖의 두께, 형태를 잡아주는 태림질 작업. (4) 물 묻힌 가죽으로 입구 가장자리를 돋워 아가리를 뚜렷하게 잡아주는 작업.
 
칠량옹기는 자연잿물을 발라 섭씨 11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낸다. 옹기가 숨쉬는 비밀은 점토에 있다. 자기는 흙물을 채로 거르지만 옹기는 작은 돌가루가 섞여 있는 흙을 그대로 구워낸다. 고온에서 수축된 고운 흙과 모래나 돌가루의 수축 정도가 틀려지면서 미세한 틈이 발생한다. 그 틈으로 옹기가 숨을 쉰다.


전통방식 옹기 굽는 강진 봉황마을 3부자

한때 옹기 구워 팔아 풍요로웠던 마을
플라스틱 등장하면서 외면당하자
어느새 옹기장 정윤석씨 홀로 남아
첫째·셋째 아들도 아버지 뜻 이해하고 동참
오늘도 마을 유일한 전통 화목가마 불 지펴
체감온도 영하 20도에도 3부자는 땀 범벅


“남도 끝자락 바닷가 마을 까까머리 소년은 하루 종일 흙과 씨름하는 게 싫었다. 옹기 대장인 외삼촌 몰래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전란 후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라 영등포역에 내린 16세 소년을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 인근 한 여관에서 3개월가량 청소 일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소년은 그 후 60년 동안 흙과 함께 지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정윤석(76)씨 얘기다.

전남 강진군 칠량면 봉황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거의 독점적으로 옹기를 구워 먹고살았다. 1년 내내 가마에서 나오는 연기가 마을을 덮었다. 20여곳의 가마에서 옹기가 쏟아져 나오면 상인들은 돛배의 뱃전까지 물이 찰랑거릴 정도로 옹기를 가득 싣고 강진만을 빠져나와 동해로 서해로 섬과 내륙의 뱃길이 열린 곳이면 어디든 닻을 내리고 항아리를 팔았다. 장사를 잘해 옹기를 모두 팔고 돌아오는 날에는 색색의 기를 높이 달고 멀리서부터 배를 좌우로 흔들며 당당하게 포구로 들어섰다. 물물교환으로 바꿔온 곡식과 생필품으로 마을은 풍요로웠다. 정씨 부부도 직접 배를 빌려 섬을 오가며 옹기를 팔았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제법 돈을 벌어 집도 사고 작업장도 넓혔다.

하지만 좋은 시절이 계속 이어지진 않았다. 플라스틱과 유리제품의 범람, 아파트 건설, 김치냉장고의 등장으로 옹기 수요는 급격히 줄었다. 눈치 빠른 상인은 마지막 옹기를 싣고 다시는 봉황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남아 있던 몇몇 배들도 영화 촬영의 한 장면으로 모두 불태워져 수장되고 말았다. 옹기를 만들던 대장들도 하나둘 마을을 떠나거나 인근에 새롭게 조성된 청자마을의 도공으로 전업했다.

옹기가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마을엔 어느새 정씨 홀로 남았다. 그는 전라도 옹기의 특징인 ‘체바퀴타림’ 방식으로 물레를 돌리며 묵묵히 봉황옹기의 맥을 이어갔다. 변신의 재주도 없었지만, 숨 쉬는 그릇인 우리 옹기의 우수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마을에 하나 남은 가마를 차마 자신의 손으로 허물 수 없었다. 다행히 자신의 뜻을 이해한 셋째아들 영균(50·이수자)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옹기 작업장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건아꾼을 자청했다. 몇 년 전부터는 도시에서 일하다 돌아온 큰아들 상균(55·전수장학생)씨도 옹기 제작에 팔을 걷어붙였다.

유난스러운 겨울 한파가 바다까지 얼린 지난달 29일 강진만 봉황마을. 바닥을 드러낸 개펄 위로 듬성듬성 누워 있는 어선과 황량한 겨울 바다가 마주한 야산 자락 흙가마에서 모처럼 장작불이 피어올랐다. 칠량봉황옹기를 운영하고 있는 정씨와 그의 두 아들이 옛 방식 그대로 전통 화목 가마에 오지그릇을 굽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불을 피우기 시작한 흙가마는 옹기 속 습기를 제거하기 위한 ‘피움불’을 시작으로 서서히 온도를 높이는 ‘돋군 불때기’가 하루 종일 이어졌다. 집 앞 방파제에도 제법 물이 차오르고 밤하늘에 별이 쏟아질 무렵 옹기장 정씨의 지시에 따라 형제는 가마 속으로 장작을 쉴 새 없이 집어넣었다. 빨간 불이 하얗게 변하면서 옹기 표면의 잿물이 윤을 내며 녹아내렸다. “정신들 똑바로 차려, 잠시라도 한눈팔면 그릇들이 모두 병나.” “마지막 불을 잘 때야 그릇이 제대로 나오는 거야.”

작업장 밖의 체감온도는 영하 20도를 넘어섰지만 3부자의 온몸은 땀범벅이었다. 1200도 가까운 불과 씨름하면서 마지막 옹기가마 곳곳에 뚫린 구멍을 통해 창불을 넣는 것으로 불때기 작업은 모두 끝났다. 어느 새 수평선 너머 여명이 밝아오고 밤을 지새운 장인이 먼저 자리를 떴다. 형제는 붉게 익은 얼굴로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옹기 같은 사람이다.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옹골차고 변함이 없다. 형제는 천년을 살아 숨쉬는 옹기처럼 들숨이 되고 날숨이 되려 한다. 형은 흙이 되고 동생은 불이 되어 아버지가 지켜온 전통옹기를 더욱 단단히 빚어내겠다고 다짐한다.

강진=글·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kkkwa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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