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아기펭귄처럼



이사를 했다. 공동주택 단지를 벗어나 산 중턱 단독주택으로. 아파트 아닌 곳에서 사는 건 삼십 년 만이다. 위아래 옆 사방으로 나를 에워싼, 내 집과 똑같이 생긴 집들에서 똑 떨어져 나온 첫날, 막막했다. ‘쩌저적’이라는 그림책에 나오는 아기펭귄처럼. 아기펭귄 한 마리가 올라선 얼음에 쩌저적! 금이 간다. 그러고는 똑 떨어져 나간다. 아기펭귄과 똑같이 생긴 수많은 펭귄이 모여 있는 빙산이 멀어져 간다. 망망대해에서 혼자가 된 아기펭귄은 놀란 나머지 물고 있던 물고기도 떨어뜨린다. 눈이 뭉개질 정도로 울어댄다. 그러다 발치에서 어른거리는 오묘한 빛에 눈물을 닦으며 둘러보니…. 그건 숨 막히게 아름다운 오로라였다. 그 뒤로 아기펭귄은 흘러가는 얼음조각 위에서 별의별 세상을 만난다. 남극의 눈부신 얼음동굴, 리오의 까마득한 예수 상, 베니스의 유쾌한 곤돌라, 산토리니(로 보이는 풍경)의 새하얀 종탑, 시드니의 날아갈 듯한 요트, 심지어는 열대 바다의 서퍼까지. 알록달록 꽃목걸이를 걸고 서핑보드를 옆구리에 낀 아기펭귄은 의기양양 고향으로 돌아온다.

쓸 거리를 고민하면서 이것저것 들춰보는데 어쩐지 손에 남던 이 그림책. 원래는 요즘 터지는 온갖 폭탄 같은 일로 조각조각 갈라지는 사람들 마음을 이 낙천적인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달래줄 수 있을까, 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계속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문득 솟아난 메시지는 ‘멀리 갈 것 없이 너부터 달랠 수 있다’였다. 돌아보면 막막하던 이사 첫날이 마침 정월 대보름이었다. 자다 깨니 창문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마치 오로라처럼. 완전 화통한 동네 주민들을 만났고, 아기자기한 산책길도 발견했다. 나는 아기펭귄처럼 눈이 뭉개질 정도로 울지는 않았다. 아기펭귄처럼 얼음이 쩌저적 갈라져 홀로 떨어져 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런 세상을 발견했겠어, 하는 메시지는 뭔지 상투적인 것 같아서 꺼내고 싶지 않다. 다만 알록달록 꽃목걸이와 서핑보드를 얻을 때까지 계속 흘러갈 수는 있지 않을까 싶다. 아기펭귄처럼.

김서정(동화작가·평론가)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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