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한이 지난 것처럼 보이는데도 여전히 통용되는 것, 그중에 하나가 가족 간의 호칭인 것 같다. 특히 결혼으로 규모가 확장될 때 가족관계에 붙는 호칭 대부분이 가부장적이어서 적어도 내 대(代)에서 끊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단어의 뜻을 들여다보면 차마 부르기 꺼려지는 호칭들이 있고, ‘댁’이나 ‘님’처럼 한쪽에는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없는 존칭으로 차별적인 구도를 유발하는 것도 있다.
그러다보니 내 친구 하나는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대상이 자신을 ‘형수’라고 부르는지 ‘형수님’이라고 부르는지를 지켜보게 됐다. 도련님이든 형수님이든 핵심은 뒤에 붙은 ‘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집중했는데도 친구는 아직 명확한 호칭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호칭을 생략하고도 대화 가능한 시동생의 신묘한 화법 때문인데, 그에 비하면 내 친구의 화법이란 일단 누군가를 호명한 후 시작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친구는 오빠의 부인이 자신을 ‘아가씨’로 부르는 게 싫어서 이름을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내 경우엔 동생의 부인을 ‘올케’로 부르지 않는데 그 뜻이 별로여서다. 이쯤 되면 기존 호칭들이 도구가 아니라 굴레가 아닌지 모두가 고민해야 한다. 요즘엔 양가 모두 아버님, 어머님, 누나, 형, 언니, 혹은 이름으로 부르는 집도 많아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변화가 집안의 질서를 무너뜨릴까 걱정하지만, 질서보다 더 중요한 게 구성원들의 기분이다. 호명하는 사람도 호명되는 사람도 편안할 수 있다면 그게 정답 아닐까.
호명 방식이 바뀐 후 꽃이 된 사람을 하나 알고 있다. 엄마는 아빠를 오랫동안 ‘○○아빠’로 불렀다. 처음에는 내 이름이 그 앞에 들어갔고 내 결혼 후에는 동생 이름이 들어갔다. 엄마가 첫째 이름으로 지금까지 불렀으니 공평하게 이제 둘째 이름으로 불러야지, 했기 때문인데 사실 아빠가 원한 호칭은 전혀 다른 거였다. 그게 난데없이 ‘오빠’가 등장한 배경이다. 중요한 건 기분이니까. 엄마가 아빠를 ‘오빠’라고 부를 때마다 아빠는 꽃이 되고 있다.
윤고은(소설가)
삽화=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