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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세상 어디에도 없는 따뜻한 블랙유머

커트 보니것은 2차 세계대전에 징집돼 독일 드레스덴 포로수용소에서 대량 학살을 목격하면서 반전(反戰) 작가로 거듭났다. ‘제 5도살장’ ‘고양이 요람’ ‘챔피언들의 아침식사’ 등 휴머니즘에 입각한 작품들을 써냈다. 포토저널리스트이자 아내인 질 크레멘츠가 찍은 이 사진에도 보니것의 인간적인 면모가 물씬 풍긴다. 문학동네 제공




세상이 잠든 동안/커트 보니것 지음/이원열 옮김/문학동네/400쪽/1만5800원

미국 작가 커트 보니것(1922∼2007)의 미발표 단편집이 나왔다. 책을 설명할 만한 수식어를 이것저것 떠올려 봐도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를 못 찾겠다. 끝 모를 상상력을 펼쳐내는 작가의 책을 앞에 두고 빈약한 어휘력만 탓하게 된다. 그저 꽤 재미있다는 것, 젊은 보니것이 이미 완성된 소설가였다는 것, 이 소설들이 20세기 중반에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감각적이라는 것.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보니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금세 수긍할 법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은 갸우뚱할 수 있다. 보니것은 누구인가. 그는 블랙유머, 날카로운 풍자, 넘치는 위트를 갖춘 휴머니스트 작가로 흔히 설명된다. 그의 책에는 시종 유머가 흐른다. 독특한 캐릭터부터 세속적인 인물까지 인간에 대한 묘사도 깊이 있다. 방대한 상상력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인간성에 대한 진지하고 깊은 통찰을 놀라운 상상력을 동원해 풀어낸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등의 찬사를 받으며 ‘작가들의 작가’라고도 불린다.

‘세상이 잠든 동안’에 실린 16편의 초기 단편들도 보니것답다. 시나리오 작가 데이브 에거스의 표현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도와주던 아주 합리적이고 믿을만한 목소리”가 젊은 보니것이 썼던 짧은 글들에도 담겨 있다. 직설적인 문체와 군더더기 없는 구성을 젊은 시절 이미 갖추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비정한 현실을 풍자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놓지 않는 메시지가 따뜻하게 와 닿는다.

단편 ‘제니’의 한 대목을 옮겨오면 이렇다. “한때 신이 당신에게 사랑하라고 주셨던 불완전한 사람을 봐줘요.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신이 허락하신다면,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고 조금이라도 좋아해보도록 해요. 그리고 여보, 제발, 다시 불완전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사람이 되어줘요.”

가전제품회사의 천재 엔지니어 조지가 죽어가는 전처 낸시에게서 들은 마지막 말이다. 조지는 낸시를 너무 사랑했다. “사랑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 되어버려.” 낸시의 얼굴을 꼭 닮고 낸시의 목소리가 녹음된 로봇 제니를 만들어냈다. 조지는 진짜 아내 대신 첫사랑의 환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로봇 제니와 함께 트럭에서 방랑하는 삶을 택한다. ‘불완전한 사람이 되어 달라’는 낸시의 마지막 부탁을 조지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100달러 짜리 키스’에서는 이런 문답이 나온다. “Q: 이 세상의 문제가 뭡니까? A: 모두 사진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아무도 피사체 자체에는 관심을 갖지 않아요.” 또 다른 작품 ‘일년에 1만 달러는 거뜬하지’에서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기관차와 냉동 오렌지주스를 파는 사람들은 수십억을 버는데,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아름다움을 가져오고 인생에 조금이라도 의미를 주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은 굶어.” 20세기 보니것의 통찰력은 시대를 뛰어넘는다.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신문사 사회부장 해클먼을 주인공으로 하는 표제작 ‘세상이 잠든 동안’은 특히 보니것다운 작품이다. 시니컬하고 풍자적이지만 동화처럼 따뜻한 비밀을 숨겨 놓았다. 16편 모두 아무 때고 꺼내들어 한 편씩 음미하며 아껴보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보니것 사후에도 이런 작품을 만나게 돼 반갑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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