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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이게 시 쓰는 기쁨의 전부”

문정희는 “여성 시인으로서 시대와 역사와 사회에 대한 투시력을 기르려고 오랫동안 노력했다. 시대를 읽지 못하고는 시를 쓸 수 없다”고 했다. 그가 4년 만에 낸 시집 ‘작가의 사랑’에는 시대정신과 싱싱한 생명력이 시종 흐른다. 사진작가 이재훈이 찍은 사진이다. 민음사 제공




문정희(71) 시인은 50년 넘게 시인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그의 시에서 시인의 나이를 가늠할 수는 없다. 문정희의 시는 언제나 생명력이 넘친다. 젊음이 시 속에 팔딱팔딱 살아있다. 최근 출간한 그의 14번째 시집 ‘작가의 사랑’에서도 그렇다. 50년의 시력(詩歷)이 그에게 불로(不老)의 언어를 선사한 듯하다.

문정희를 지난 3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꾸준히 젊은 시를 쓸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이게 시 쓰는 기쁨의 전부예요. 누군가 시를 읽고 울었다거나 행복했다면 고마운 거고요. 쓰는 기쁨을 다른 것과 바꾸지 못하고 계속 쓰는 겁니다.”

문정희는 시대의 비극, 여성의 아픔을 따뜻한 시선으로 매만져 온 시인이기도 하다. 이번 시집에서는 유독 많은 여자들의 이름을 불러줬다. 공쿠르상 수상작을 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상을 받지 못했던 프랑스 시인 안나 드 노아이유, 멕시코 전설에 나오는 ‘우는 여인’ 요로나, 한국전쟁 직전 간첩으로 몰려 총살을 당한 김수임 등이 시의 언어로 쓰였다. 어머니, 할머니, 딸들이 시로써 다시 태어났다.

특히 주목받은 작품은 ‘곡시(哭詩)-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다. 1910년대 이름을 날렸던 작가 김명순을 기리는 시다. 김명순은 문단 내 성폭력의 첫 번째 희생자이기도 하다. 김동인 김기진 방정환 등 당대 문단의 권력자들이 김명순의 성폭력 피해를 도리어 모욕하고 능멸했다. 김명순을 짓밟았던 슬픈 역사는 문정희를 만나 시가 됐다.

“한국 여성 최초의 소설가, 처음으로 시집을 낸 여성 시인,/ 평론가, 기자, 5개 국어를 구사한 번역가는/ 일본 뒷골목에서 매를 맞으며 땅콩과 치약을 팔아 연명하다/ 해방된 조국을 멀리 두고 정신병원에서 홀로 죽었다 (중략) 꿈 많고 재능 많은 그녀의 육체는 성폭행으로/ 그녀의 작품은 편견과 모욕의 스캔들로 유폐되었다.”

문정희는 “여성들이 말을 하는 시대가 됐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책 제목이 ‘시인의 사랑’이 아니라 ‘작가의 사랑’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 붙여졌다. “작가(author)라는 말에는 ‘권위(authority)’라는 뜻이 담겨 있잖아요. 말과 글에는 권위가 있어요. 여자들이 훼손당하고 모욕당한 일들을 말해야 합니다.”

문정희는 사회의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는 시인이다. 시로써 사회에 참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문제가 불거졌을 때 여성 작가들이 함께 낸 성폭력 수기 ‘참고문헌 없음’에도 힘을 보탰다. ‘곡시’는 이 책에 먼저 실렸다.

이는 시대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그의 신념과 맞닿아 있는 실천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문정희는 “논리와 인문학의 회복”을 말했다.

“시대가 사납고 원시적이에요. 언어는 빈약하고 천박해졌어요. TV를 틀어놓고 연예인들의 수다를 들어보면 가장 많이 쓰는 언어가 ‘진짜’, ‘대박’ 두 가지예요. 인문학적 정신이 회복되고 논리와 지성이 기본이 되는 사회로 바뀌어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문정희는 스스로 “사회 계몽을 부르짖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의 시를 여성학적 관점으로만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드러냈다. “저는 시인이고 싶어요. 제 시가 여성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것도 싫습니다. 사실도 아니고요. 의미망이 깊은 시를 쓰고 싶습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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