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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나침반] 건강수명 88% 시대를 사는 법



지난해 11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우리나라 국회 연설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오늘날 한국의 경제는 1960년과 비교해 350배 성장했고 교역은 거의 1900배 증가했으며, 평균 수명은 53세에서 82세 이상이 됐다.”

어릴 적 친구 할아버지의 회갑연에 따라간 기억이 있다. 그런데, 요즘 회갑연에 초대받은 경험이 있나. 심지어 초대하면 실례라고 한다. 대부분 조용히 가족 회식으로 대신하거나 여행을 떠난다. 칠순은 당연하고 팔순 정도는 돼야 친척에게 얘기를 꺼낼 정도다. 현대인의 수명 증가가 세계적 추세라 해도 유독 우리나라에서 두드러진다. 지금 노년층이 어릴 때 영양부족과 감염 등으로 형제를 잃은 경우가 많아 수명의 전체 평균이 낮았던 부분도 일부 있다.

작년 초 세계적 의학학술지 랜싯(Lancet)에 발표된 논문에서 2030년에 태어날 한국 여성은 평균 기대수명 90.8세로 최장수국 국민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프랑스 88.6세, 일본 88.4세가 그 뒤를 잇는다. 같은 해 태어날 한국 남성의 평균 기대수명도 84.1세로 전 세계 남성 가운데 1위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성이 남성보다 오래 사는 것은 성별이 갖는 고유의 특성도 있지만 남성이 흡연, 음주, 사고와 관련이 깊은 면도 있다. 미국은 어떨까. 같은 해 여성과 남성의 평균 기대수명은 각각 83.3세, 76.5세로 한국에 훨씬 못 미칠 것으로 보인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아직도 지병을 치료한다며 공기 좋은 곳을 찾는 사람이 더러 있다. 하지만 공기 좋기로 따지면 지금보다 조선시대가 훨씬 좋았고 땅이 넓은 미국이 한국보다 훨씬 좋은 곳이 많다. 국내에서도 의료시설이 많고 소득수준이 높은 대도시 인구가 공기 좋은 농촌 인구보다 평균 수명이 길었다. 결국 국내외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가장 진료받기 좋은 환경이라는 점을 꼽는다. 작년 6월 국제학술지 완화의료(Palliative Medicine)에 발표된 12개국 분석 연구를 보면 문화적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병원에서 임종을 맞는 비율은 우리나라가 72.5%로 가장 높았고, 뉴질랜드는 33.6%였다. 여기에 국가건강검진을 중심으로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히 건강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건강검진 시스템이 있다.

세계 최장수국 반열에 진입하는 우리나라 국민은 이제 관심을 단순히 얼마나 오래 사느냐에서 얼마나 ‘건강하게’ 오래 사느냐로 바꿔야 한다.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줄 정도의 질병이나 부상 없이 건강한 상태로 살 수 있는 수명을 ‘건강수명’이라 할 때 2015년 기준 우리나라 국민의 건강수명은 73.2세다. 평균 82.1세에 삶을 마감할 때까지 8.9년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병상에서 지낸다. 이 기간이 전체 인생에서 12%를 차지하므로 인생의 88%만 건강하게 사는 것이다. 건배사에 등장하는 구구팔팔이삼사(99-88-234), 즉 99세까지 팔팔하게 살고 2∼3일 앓다가 사망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더욱이 60대 전후(그보다 빠를 수도 있지만) 은퇴하고 20년을 더 살려면 대부분 경제활동을 계속 해야 하는데 이때 질병이 큰 변수가 된다. 여기저기 아파 일하지 못하는 날이 많아지고 그나마 젊은 날 어렵게 모아둔 재산은 진료에 쓴다.

단지 오래 사는 차원을 넘어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그리고 노년에 ‘경제적으로 건강하게’ 살려면 건강검진으로 몸 상태를 확인하고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 건물 안전점검을 정기적으로 제대로 받고 조치해야 화재나 붕괴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원리와 같다. 건강검진에 들어있는 혈압(고혈압), 혈당(당뇨병), 콜레스테롤(이상지질혈증) 수치는 급성 심근경색증(심장마비)과 뇌졸중(중풍)의 발생위험을 예측해 준다. 질병관리본부가 발간한 만성질환 현황과 이슈에 따르면 미리 건강검진을 안 했을 경우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했을 위험이 2000년에 비해 2015년은 절반 수준으로 낮아졌다.

88만원 세대? No! 건강수명 88% 시대다. 잘 관리하면 건강수명이 100%에 근접하지만 건강검진을 건너뛰고 흡연과 과음 속에 살아가면 남보다 줄어드는 평균 수명에서 건강수명이 80% 아래가 될 수 있다.

안지현 한국의학연구소 내과전문의 (대한검진의학회 총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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