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음악적 이상향 ‘엘 시스테마’의 빛과 그늘


 
‘엘 시스테마’ 창립자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오케스트라가 지난달 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열린 경야(經夜·장례식 전 가까운 사람들이 관 옆을 밤 새워 지키는 일)에서 연주하고 있다. 아브레우 박사는 향년 78세로 숨졌다. AP뉴시스
 
아브레우 박사가 2010년 방한해 서울평화상을 수상하기 전 기다리고 있는 모습. 뉴시스


지난달 말 베네수엘라의 무상 음악 교육 프로그램 ‘엘 시스테마’의 창립자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가 별세했다. 1975년 그가 음악으로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수도 카라카스의 지하 주차장에 빈민가 아이들 11명을 모아 시작했다는 ‘엘 시스테마’의 태동은 아직도 전설처럼 회자된다. 이 미미한 시작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2015년 베네수엘라 전역에 400개가 넘는 음악 센터에서 70만명이 넘는 아이들이 음악을 배우는 규모로 성장했다. 이뿐 아니라 그 사례를 모방한 다양한 ‘엘 시스테마’의 아류와 분점이 널리 퍼져 전 지구적인 ‘시스템(el sistema)’을 구축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명박정부 시절 문화체육관광부와 보건복지부, 교육부가 저마다 ‘한국형 엘 시스테마’를 만들겠다고 각기 거액의 예산을 편성해 경쟁적으로 중복 사업을 펼쳤다가 용두사미가 된 사례가 있다.

‘엘 시스테마’가 세계적인 공감을 얻은 이유는 예술이 인류와 사회를 진보시키는 사례를 실증적으로 보여줬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국내에서는 ‘음악교육을 통한 개천에서 나온 용 양성’ 비슷하게 취지가 왜곡되었지만 ‘엘 시스테마’의 궁극적 의도는 양질의 음악인 양성이 아니라 음악 교육을 통한 빈곤층 청소년들의 사회화와 고용 창출에 있었다. 학교 수업 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평균 4시간가량 아이들을 음악센터에 붙잡아 놓음으로써 거리에서 범죄에 노출될 기회를 차단하는 효과를 노렸다. 여기서 무료로 음악을 배운 아이들 중 직업 음악가로 성장하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은 다양한 직종으로 스며들었다. 빈곤으로부터의 구출과 사회복지, 고용증가에 따른 경제성장, 건전한 시민 양성에 이르기까지 ‘엘 시스테마’ 효과는 미학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관점에서 성취됐다.

전 세계가 ‘엘 시스테마’ 아이들의 연주에 열광하고 모방하던 시절, 이처럼 이상적인 ‘시스템’이 잡음 없이 유지되는 방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민주주의 세계는 ‘엘 시스테마’를 답습하면서도 그 운영주체가 고(故)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독재정권이라는 점도, 아브레우 박사가 ‘엘 시스테마’를 차베스 정권의 나팔수로 활용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차베스 전 대통령은 적국인 미국의 기업들로부터 ‘엘 시스테마’를 위한 후원을 유치하고 그곳 출신의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을 LA필 예술감독으로 입성시킴으로써 국위 선양이라는 효과까지 얻었다.

2010년 베네수엘라를 방문한 영국 음악교육자 조프리 베이커 교수는 ‘엘 시스테마’에 대해 찬양 일색의 반응과 다소 결이 다른 비판을 제기했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경제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과 해외 후원금의 불투명한 유용을 지적하며, 그는 ‘엘 시스테마’ 수혜자의 90%가 빈곤계층 아이들이라는 베네수엘라의 주장과 달리 부유한 중산층 이상 출신이 절반이 넘는다는 사실도 현지에서 발견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교육 방식이었다. 스승과 제자, 선후배 사이의 엄격한 상명하복 관계와 폭력적인 처벌 방식, 강제적인 학습 과정을 목격한 그는 ‘엘 시스테마’를 ‘완벽한 독재 단체’라고 비판했다.

포퓰리즘 정책의 반작용으로 베네수엘라가 국가적 파산에 직면하면서 세계 음악계는 ‘엘 시스테마’의 존폐 여부에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들려온 아브레우 박사의 사망 소식으로 그의 숭고한 예술정신을 기리는 추모 및 찬양의 행렬이 전 세계적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색된 낭만적 신화가 아니라 ‘시스템의 진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냉철하고 객관적인 비판의 시선이다.

노승림<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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