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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비명 같은 시 상처를 보듬다



“안돼요는 우리집에서 나쁜 말이었어/ 안돼요라 말하면 매를 맞았지/…/ 그가 나를 덮쳤을 때/ 내 온몸이 거부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안돼요라고 말하지 못했어/ 소리를 지르려고 했을 때/ 내 몸에서 나온 것은 침묵뿐이었어”

시집 ‘해와 그녀의 꽃들’에 실린 ‘어릴 때 배우지 못했는데, 커서 어떻게 동의를 말하겠는가’의 일부분이다. 시인 루피 카우르는 인도 출신 캐나다인이다. 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문화에서 자랐고 성폭력 피해를 당한 카우르는 시를 통해 고통에서 벗어났다.

그의 시가 알려진 것은 인스타그램에서다. 완전히 무명이었던 카우르는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일러스트와 시를 올려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았다. 첫 시집 ‘밀크 앤 허니’는 출간 2년 만에 30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지난해 10월 출간한 이 책은 6개월여 만에 100만부 이상 팔리며 미국 아마존과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카우르의 시는 ‘문학성이 약하다’는 이유로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쉬운 단어로 쓰였고 인스타그램에서 인기를 얻었다는 게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그의 시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수많은 여성들을 위로하고 치유했다. 문학적으로 얼마나 뛰어난 성과를 냈느냐는 것 못잖게 얼마나 많은 독자들의 삶을 변화시켰느냐도 중요한 문제다.

이번 시집은 ‘시듦, 떨어짐, 뿌리내림, 싹틈, 꽃핌’ 다섯 가지 목차로 나뉘었다. 시든 뒤에야, 떨어지고 나서야 단단하게 뿌리내릴 수 있고 싹을 틔울 수 있고 꽃을 피울 수 있다. 시집은 여성의 삶과 사랑도 그러하다는 것을 그려내고 있다.

카우르는 2015년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 장을 올리면서 유명해졌다. 생리혈이 묻은 회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침대에 옆으로 누운 사진이었는데, 인스타그램이 부적절한 게시물로 분류해 삭제했다. 카우르는 반발했고, 여성들은 연대했다. 인스타그램은 일주일 뒤 “실수였다”며 사과했지만 여성의 몸과 생리에 대한 혐오 시선을 드러낸 것으로 두고두고 비판받았다. 예술가로서 시와 그림과 사진으로 카우르는 저항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시집에도 현실을 고발하고 편견에 저항하는 정신을 담았다. 영어를 어려워하는 인도인 이민자 부모를 위해 쉬운 표현을 쓴다는 그의 시들은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하고 곱씹을 만하다. 제목 없는 시의 일부분이다. “그 물에 나를 담갔다/ 더러움이 모두 씻겨 나가길 간절히 바라면서/…/ 다음 한 시간은/ 울었다/ 내 몸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나왔다/ 누가 알았을까 여자애도 짐승이 될 수 있단 걸”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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