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태도나 행동을 가리킨다. 두 개의 단어를 결합해 만든 신조어인데 ‘Gap(갑·甲)’은 계약에서 첫 번째 당사자를 제시하는 단어로 이제는 우월한 상태를 나타낸다. ‘∼jil(∼질)’은 특정 행동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접미사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없는 ‘갑질’을 위키피디아 영문판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최근 경제를 지배하는 부유한 엘리트 권력이 한국 사회의 직업 문화, 계층적 특성과 결합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재벌가 갑질 사건은 서민들에게 좌절감을 준다.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갑질’로 국민적 분노가 커지는 와중에 미국에서 들려온 바버라 부시 여사 별세 소식은 묘한 박탈감을 줬다. 남편과 아들을 ‘세계 최고 권력자’인 미국 대통령으로 만든 그녀는 미국인이 가장 사랑한 영부인이었다. 그녀는 가짜 진주목걸이가 트레이드마크일 정도로 수수한 이웃집 할머니의 모습으로 문맹 퇴치와 여성 권리 증진에 힘썼다. 물론 대한항공 일가 입장에선 부시 여사와 비교하는 걸 마뜩지 않게 느낄 수 있겠다. 뉴욕타임스는 갑질을 “봉건 영주처럼 행동하는 기업 임원이 부하나 하청업자를 학대하는 행위”라고 했다. 맞다. 권력을 세습한 조 전무와 달리 부시 여사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 진짜 왕족과 비교해볼까. 온갖 기행으로 악동이라 불렸지만 이제는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국의 해리 왕자 말이다. 굳이 아프가니스탄 파병이나 자선단체 센테베일의 공동 창립 등을 얘기할 필요 없이 구글에서 해리 왕자 이미지를 검색해 보면 답은 나온다. 어린 아이나 휠체어를 탄 상이군인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고 있다. 외신들은 자선사업을 하던 어머니 다이애나비에게서 배운 것이 행동으로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갑질은 부와 권력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 분위기와 학습이 만든다는 것이다. 경희대 송재룡 교수도 갑질 해소 방법을 위해 조언한다. ‘갑·을’의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고 그 시작은 가족이라고. 그러고 보니 조 전무는 어머니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의 막말과 폭행을 빼닮았다. 그래서 걱정이다. 재벌가 갑질이 계속 터질 경우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없는 이 단어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전인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chaebol(재벌)’과 함께 오를지 모른다는 괜한 걱정.
서윤경 차장
삽화=이영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