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나를 아동문학으로 이끈 결정적 계기 중의 하나다. 문학이란 말을 가지고 노는 일, 기발한 상상력과 통쾌한 풍자로 인간과 삶의 여러 국면을 다이내믹하게 파헤쳐 보여주는 일이라는 인식도 덕분에 갖게 됐다. 이 책에는 유명한 캐릭터들이 여럿 나오는데, 그중에 하트의 여왕이 있다. 매사에 화를 버럭버럭 내며 사형 선고를 내리는 카드 여왕. 요즘 어이없는 갑질로 유명해진 재벌 총수 집안의 여자들을 보니 그 여왕이 떠오른다. 걸핏하면 “저들의 목을 쳐라”를 외치는 하트 여왕은 급기야 앨리스를 향해서도 “저 애의 목을 쳐라” 명령한다. 재판하는 자신에게 항의했다는 이유에서다. 법도 질서도 심지어 상식도 실종된 법정에서 앨리스로서는 당연한 항의였다.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병사들. 이상한 나라에서 이상하게 작아졌던 앨리스는 분노의 힘으로 다시 자신의 키를 키우며, 소리 높여 외친다. “너희들은 그저 카드 한 묶음일 뿐이야.”
이 책을 쓴 루이스 캐럴이 살던 왕정시대에 왕족과 귀족들의 갑질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었을 것이다. 무자비하고 잔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내성적인 작가가 여덟 살 아이를 위해 만들었던 이야기에서 그 갑질은 한순간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완전히 무력해진다. 사실 여왕의 사형선고는 집행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나. 너희들은 카드일 뿐이라는 앨리스의 외침에 왕과 왕비와 병사들은 즉시 카드로 변하고, 휘두르는 앨리스의 팔에 맞아 우수수 떨어진다. 아마도 세계문학사상 가장 통쾌한 결말 중 하나가 아닐까.
이 책이 나온 지 150여년. 세상은 더 이상 왕정시대가 아닌데도 마구잡이로 사형선고를 내리는 여왕은 교묘하게 모습을 바꾼 채 여전히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여왕이 아직 존재한다면, 우리들의 앨리스도 건재하다. 분노의 힘으로 제 키를 늘리며 너희는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고 외치는 앨리스들이. 결국 이 책의 주인공은 하트 여왕이 아니라 앨리스이고,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다. 마지막 칼럼을 이런 믿음으로 맺는다.
김서정(동화작가·평론가)
삽화=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