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명록에 ‘백두산 서체’로 “새로운 력사는 이제부터…”
文 대통령과 악수 나눈 뒤 기자에게 “잘 연출됐습니까”
검은색 인민복 착용은 사회주의 포기 않겠다는 의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7일 한국 땅을 밟고 처음 쓴 글자는 ‘평화’였다. 김 위원장은 남북 정상회담 장소인 판문점 평화의집 방명록에 “새로운 력사(역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력사의 출발점에서”라고 적었다. 자신의 평소 글씨체대로 전체적으로 오른쪽 윗부분으로 기울어진 글씨체였다.
김 위원장은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글씨체인 ‘백두산 서체’를 따라 쓴다. 이는 모두 김일성 주석의 ‘태양 서체’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3부자 모두 글씨의 각도가 오른쪽으로 급하게 올라가는 특징을 보인다. 북한 월간지는 “김정은 원수님께서는 글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장군님(김정일)의 필체인 백두산 서체를 따라 배우기 위해 많은 품을 들였다”고 소개한 적이 있다.
필적 전문가인 구본진 변호사는 김 위원장의 방명록 글씨체에 대해 “전체적으로 도전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두뇌 회전이 빠른 인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어 “글자 사이의 간격이 좁은 것은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남에게 피해주는 것도 개의치 않는 성격인 것 같다”고 했다. 글씨 규칙성의 변화 정도가 심하지 않은 점을 미루어 볼 때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인물이라는 평가도 했다. 구 변호사는 “충동적이긴 하지만 그 정도가 심하지는 않다. 예측하기 어려운 돌출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방명록에 적은 날짜에서는 숫자 7이 눈에 띈다. 김 위원장은 7을 쓸 때 먼저 세로획을 꺾어 내린 뒤 가로획을 하나 긋는 방식으로 썼다. 주로 영미권이나 유럽에서 7을 이런 식으로 적는다. 어렸을 때 스위스에서 유학 생활을 한 영향으로 보인다.
글씨체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김 위원장은 이날 파격적인 행동으로 분위기를 주도하며 시종일관 회담 주도권을 쥐려는 모습을 보였다. 김 위원장은 군사분계선(MDL)을 넘어와 사진촬영을 마친 뒤 갑자기 북쪽을 가리키며 문 대통령의 손을 끌며 ‘깜짝 월경’을 제안했다. 전통의장대 사열을 받고 이동하는 도중에는 “문 대통령이 초청해주면 언제든지 청와대에 가겠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 있는 태도를 보였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 남한 땅을 밟은 북한지도자이지만 위축되거나 긴장한 모습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회담장인 평화의집으로 이동한 후에도 김 위원장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문 대통령과 악수를 나눈 뒤 취재진을 향해 “잘 연출됐습니까?”라는 농담도 건넸다. 김 위원장은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으로 우리 정부가 수차례 새벽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했던 상황을 농담조로 표현하며, 남북 간 긴장상황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프로파일러인 배상훈 서울디지털대 경찰학과 교수는 “김 위원장이 여러 깜짝 제안을 한 것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주변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다는 의미로, 리더십을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형희 한국바디랭귀지연구소장도 “과장된 꾸밈 같은 부정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했고 신뢰감도 강조했다”고 분석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옅은 줄무늬가 들어간 검은색 인민복을 입고 판문점에 나타났다. 인민복은 사회주의 지도자의 상징이다. 남북관계가 평화 국면을 맞더라도 사회주의를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뿔테 안경도 썼는데 회담 중간에 안경을 벗기도 했다. 집권 이후 체중이 40㎏ 정도 늘어난 것으로 알려진 김 위원장은 이날 살이 다소 빠진 모습이었다.
판문점 공동취재단
김판 노용택 기자 pan@kmib.co.kr
사진=이병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