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가지 서체 중 ‘민체’가 채택
‘1박2일’·영화 ‘축제’ 글씨 유명
“역사적인 일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탰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어요. 세계 이목이 집중된 그 순간 가슴이 벅차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서예가인 여태명(62) 원광대 미술학과 교수는 29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이틀 전 TV로 지켜보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쿵쾅거린다”고 말했다.
‘평화와 번영을 심다.’ 여 교수는 지난 27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함께 심은 나무의 표지석 글씨를 썼다.
“지난 21일이었어요. 서울 가는 기차 안에서 ‘02-’로 시작되는 낯선 전화가 걸려왔지요. 평소 모르는 전화는 받지 않는데 그날따라 받았어요.”
여 교수는 청와대 사람이었는데 “글씨를 써 달라”는 주문이었다고 떠올렸다. 조건은 ‘공개될 때까지 비밀 준수’였다. 다음 날 이메일을 확인하고 학교 작업실에서 홀로 한지를 폈다. 표지석에 들어갈 글자는 47자. 본문 8자는 3종류로 썼다. 연습도 없이 한 종이에 한 번에 써내려갔다. 말 그대로 ‘일필휘지’였다.
“믿을 수 없었어요. 보통 미리 한두 번 써보고 쓰다가 다시 쓰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단 한 자도 머뭇거림 없이 썼어요, 아니 써졌어요.”
3가지 서체는 ‘용비어천가 서체’(사진 맨 위)와 ‘완판본체’(가운데 거꾸로 된 글씨), ‘민체’(맨 아래)였다. 여 교수는 중간에 먹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한 줄씩 반대쪽에서 썼다. 청와대는 민체를 선택했다. 민체는 조선시대 후기 민간인들이 편지글 등에서 쓰던 글씨를 그가 연구하고 정착시킨 글씨다. 사진을 찍어 보냈는데 나중에 보니 본문 ‘∼심다.’에서 ‘.’(마침표)는 빠져 있었다.
두 정상의 직책과 날짜는 훈민정음 용비어천가서체를 혼용했다. 본문과 사람 이름이 조화를 이루고 화합하는 것이 바로 평화를 이루고자하는 국민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회담이 이렇게 잘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어요. 희망은 가졌지만…. 앞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잘 풀어나갔으면 합니다. 서두르지 말고 너무 느긋하지도 말고요.”
여 교수는 “평화의 길로 가는 남북 정상회담에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두 정상이 말한 것처럼 한반도 평화 선언이 다시 뒤로 가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60년 글씨 인생에 가장 의미 있는 글씨를 썼다. 조만간 표구작업을 할 것”이라고 말한 여 교수는 청와대의 글씨 값에 대해서 묻자 “아직 받지 못해서 모르겠다”며 웃었다.
전북 진안 출신인 그는 문화체육관광부 현판과 전주 나들목 현판, KBS 프로그램 ‘1박2일’ 등을 썼다. 1997년 영화 ‘축제’를 만든 영화사가 자신의 글씨를 몰래 쓰자 소송을 걸어 승리하며 지적재산권 관련 소송에 한 획을 긋기도 했다.
전주=김용권 기자 ygkim@kmib.co.kr
사진=이병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