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우리 시대를 반영하는 두 부류의 막강한 대중영화가 있다. 첫 번째 부류는 각각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을 소재로 한 '택시운전사'와 '1987'과 같은 영화다. 두 작품을 묶어 '문재인 시대의 영화'라고 명명한다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 방문 당시 여러 일정 중 하나였던 '미씽: 사라진 여자'의 관람을 제외한다면, 문재인이 대통령으로서 공식 관람한 영화도 아직까지는 '택시운전사'와 '1987', 이 두 편이며, 두 편 모두 센세이셔널한 흥행을 기록했다.
그는 두 차례 모두 눈물을 훔치며 관람했고 후기 역시 남겼는데 ‘택시운전사’에 관해서는 “아직 광주의 진실은 다 규명되지 못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남은 과제”라고 말했고, ‘1987’에 대해서는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말했다. 그의 관람과 후기는 크게 주목받았다. 심지어 개봉 초반 다소 기대에 못 미치며 흥행 약세에 놓여 있던 ‘1987’은 대통령의 극장 방문 시기를 기점으로 관객 수가 급증하며 흥행 뒷심을 발휘했다.
부당하게 처리되거나 약소하게 인정받은 근현대의 중대한 과거사에서 직접 사건과 인물을 소환해 오늘날의 관객 앞에 내어 놓고, 관객을 일종의 적극적인 참여적 시민의 자리 쪽으로 유도하는 이 두 편의 영화는 긍정적인 역사 기술서로서의 역할을 자처하는 동시에 또한 그 내용과 자세 때문에 각광받았다. 박근혜 시대의 연장 아래 있었다면 그런 결과는 불가능했거나, 적어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재로 했던 영화 ‘변호인’이 그러했듯이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해도 은밀한 외압과 정치적 불이익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첫 번째 부류보다 조금 더 흥미로운 건 시기적으로 약간 앞서 개봉됐던 두 번째 부류의 영화들이다. 이 부류의 작품들은 전자와 다르게 올바르지도 투명하지도 확실하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철저한 장르성 안에서 자극적이고 불편한 것투성이인데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동시대의 정서적 충격을 적나라하게 기입해냈다.
‘아수라’와 ‘더 킹’이 그러했다. 2016년 9월 28일에 개봉한 ‘아수라’와 2017년 1월 18일에 개봉한 ‘더 킹’은 그 기간만 보더라도 개봉을 전후로 몇 달간 벌어진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정국과 거의 맞물려 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참혹한 이 사건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본질을 상기시키기까지 하는 부분이 있다. 두 번째 부류, 즉 두 편의 영화를 ‘박근혜 말기 시대의 영화’로 칭해도 될 것이다.
‘폭력배형 권력자들’ ‘절대 악으로서의 권력자들’이라는 인물형의 출현이 이 부류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누가 가장 악인인가. 최상위에 있는 가장 힘이 센 사람이 가장 악인이라는 것이 이 영화들의 가정이다. ‘아수라’에서는 한 도시의 시장이, ‘더 킹’에서는 검찰 내에서도 유달리 막강한 힘을 가진 검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는 둘 다 왕처럼 군림한다. 정쟁과 범죄가 경계 없이 그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데 그 양상은 언제나 고도의 정치 수완이나 세련된 수 싸움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길거리 폭력배들의 진흙탕 몸싸움이거나 절대적 악당의 지독한 악행으로 묘사된다.
물론 2015년 11월 19일에 개봉해 예상치 못한 흥행 주역이 됐던 영화 ‘내부자들’에서 이미 전조는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 사회 최상위 권력층이 누린다고 상상해볼 수 있는 거의 모든 부패의 현장이 담겨 있다. 특히 인물들 중에서도 한 유력 신문사의 논설주간인 이강희(백윤식)가 핵심이다. 하지만 신문사의 일개 논설주간이 한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시대는 예전에 지나갔음을 누구라도 알고 있으니 이것은 오히려 동시대적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내부자들’의 영화적 상상이다.
그럼에도 영화 속에서 이강희가 내뱉은 대사 “대중은 어차피 개, 돼지”라는 말은 놀랍게도 현실 관료(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입을 통해 반복됐고, 해당 관료는 이 영화에서 보고 들은 걸 따라한 것임을 순순히 밝힘으로써 맥락과 무관하게 이 인물형에게서 크나큰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한 셈이 됐다. 그는 왜 그런 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을까. 혹시라도 이강희가 권력형 지식인이라는 틀 안에 있지 않았더라도 그는 그 말을 흉내 내고 싶었을까. 하지만 그조차 ‘아수라’의 박성배(황정민)를 감히 따라하진 못할 것이다.
‘아수라’에서 최상위 권력층의 핵심 인물은 더 이상 ‘내부자들’과 같은 지식인의 계열에 있지 않다. 영화 속에는 가상의 도시 안남을 지배하는 시장 박성배가 있는데, 그는 이강희와는 차원이 다르다. 박성배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인명을 살상하는 데 거리낌이 없고 피를 묻히는 데 두려움이 없다. 자금을 충원하기 위해 마약 밀매를 하는 시장이라니, 이건 여느 범죄 조직 두목이나 하는 짓이 아닌가. 부패한 최상위 권력층을 거의 공상과학 만화 속 악당의 수위로 끌어 올린 것이 ‘아수라’다.
‘아수라’에서 폭력배 같은 정치인과 공무원들의 행각은 영화의 대단원인 장례식 장면에서 마침내 난투극으로 구체화되며 정점이자 최후를 맞는다. 좁은 장례식장에서 피의 난투극을 벌이는 그들은 우리 눈에 보이는 그대로 정치인이 아니라 폭력배들이다. 한쪽은 한 도시의 시장이고 또 한쪽은 유능한 공무원인 검사(곽도원)이지만 이 대목에서 양쪽의 실체를 가장 정확하게 보고 있는 건 주인공 한도경(정우성)이다. 그는 양쪽을 만나게 하고는 빈정거리며 이런 대사를 던진다. “진작에 만나게 해드리는 건데, 두 분이 잘 맞을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침내 돌아온 망령을 만나게 된다. 세기의 전환을 앞두고 ‘넘버3’(1997)가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독재와 탄압의 시대를 돌아보면서 한국사회의 어두웠던 면모를 조폭사회로 빗댔던 것이라면, 그리고 그 영화의 후반부를 ‘카오스’라고 이름 짓고 아수라장 같은 조폭들의 난투극을 배치해 뒀던 것이라면, ‘아수라’에서는 빗댈 것도 없고 풍자할 것도 없이, 정치인과 관료가 그저 완전한 폭력배이자 절대 악으로 화하여 이 피의 대단원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비리 검사 출신인 ‘더 킹’의 주인공 박태수(조인성)가 자신의 행적을 돌아보다 문득 던지는 말, “이런 얘기를 하다 보면 내가 진짜 조직폭력배가 된 것 같다”는 그 말은 ‘더 킹’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아수라’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다만 한쪽은 종국에 이르러 전멸을 택하고(‘아수라’), 또 한쪽은 반전의 시작을 택한 것(‘더 킹’)이 차이라면 차이일 뿐이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서의 폭력배형 권력자들 혹은 절대 악으로서의 권력자들은 두 편의 영화가 감히 쫓아올 수 없을 정도로 확실히 영화를 앞질러 있었음이 곧 드러났다. 현실이 실은 이 영화들의 상상력보다 몇 수 위에 있었다. 어떻게 이런 도시가 있을 수 있는가(이게 도시냐?), 어떻게 이런 시장이 있겠는가(이게 시장이냐?), 이런 검사가 몇이나 있겠나(이게 검사냐?). 그런 기본적인 반문을 전제로 장르적 상상과 쾌감 안에 충분히 머물러 있던 우리들은 도리어 그것이 중대한 현실이었음을 알게 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전면적으로 드러나자 ‘이게 나라냐?’라는 반문은 전 국민의 비극적 표어가 됐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가 마침내 대통령직에서 파면됐고 그로써 한 시대가 마감됐다. 그 얼마 뒤, 가상의 서울시장 선거전을 둘러싼 음모를 소재로 삼았고 꽤나 많은 관객의 관심을 받을 거라고 기대됐으며 만듦새도 괜찮았던 영화 ‘특별시민’(2017년 4월 26일 개봉)은 예상과 다르게 관객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과거 현실 정치의 추악한 면모를 돌아보게 하는 것에 관객이 피로감을 느낀 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 어쩌면 그 대중적 외면은 ‘택시운전사’와 ‘1987’이 도착했을 때 그 명백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지나치게 이 영화들을 환대한 이유와도 아주 연관 없진 않을 것이다. 당시의 대중들은 영화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나 청산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한 것 같다.
시대가 바뀌었다. 부정의 길이든 긍정의 길이든 영화도 항상 그 길에서 멀리 있지는 않을 것이다.
■김성수 감독은
방황하고 도발하는 젊은 청춘들 이야기 '비트' '태양은 없다'로 명성
김성수(57·사진) 감독은 세종대 영문과, 동국대 대학원 영화과를 졸업했다. 데뷔작은 이병헌 주연의 '런어웨이'(1995)다. 그를 일약 스타 감독이자 흥행 감독으로 만들어 준 작품은 이후에 내놓은 '비트'(1997) '태양은 없다'(1998)이다. 방황하고 도발하는 젊은 청춘들의 이야기를 세련되고 속도감 있는 비주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의 신인 스타였던 이병헌 이정재 정우성 등과 친밀히 작업하는 감독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었을 뿐 아니라 많은 인원과 물량이 투입된 대작 무협물 '무사'(2001)는 큰 도전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관객을 끌어오진 못했고, 이어진 소박한 코미디 작품 '영어완전정복'(2003)은 김 감독의 색깔을 제대로 드러내는 데 실패했다. 그 뒤 오랜 시간 동안 침체기를 보내야 했고, 10년이 지나 재난영화 '감기'(2013)로 복귀하게 된다. 전염성 바이러스 창궐을 소재로 삼았던 이 영화로 김 감독은 장르적인 성과를 거두는 한편 한국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는 것에도 성공하게 된다. 이후 다시 3년 뒤 '아수라'를 만든다. 호화 출연진에 비한다면 큰 흥행을 거두진 못했지만 김성수 영화 스타일이 꽃을 피운 그의 영화의 정점이라고 해도 될 법하다.
<정한석 영화평론가>
그동안 '명화는 시대다'를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