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아버지의 대화 한토막이다. “아들아, 이 애비가 널 성인으로 간주해도 될까?” “참, 진즉에 그러셨어야죠.” “그게 그러니까 말이지…. 내가 지금부터 너한테 들려줄 얘기는 네 엄마뿐 아니라 애비인 나한테도 껄끄러운 얘기거든.” “그 말을 들으니 더 궁금해지네요!”
같은 해 이틀 간격으로 이혼을 한 아버지와 아들은 이렇게 끊임없이 수다스러운 대화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데면데면했던 부자(父子)는 사랑하는 사람을 비슷한 시기에 떠나보냈다는 기묘한 우연을 함께 맞으며 급속도로 친해진다. 두 사람은 34년 동안 매달 첫째 주 일요일이면 ‘라 플로티유’(불어로 함대라는 뜻)라는 이름의 카페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사랑’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왜 자꾸 사랑에 실패하는가’에 대한 분석이다. 두 사람은 ‘지속적인 사랑의 비밀’을 알고 싶어 했고 대화를 통해 그 답을 함께 찾아 나선다. 성인이 된 아들과 노인이 된 아버지가 시답잖은 농담과 진지하고 깊이 있는 성찰을 나누는 장면들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고 즐겁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어째서 결혼 생활에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찾으셨어요?” 두 사람은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이러저러한 가설을 세우고 논리를 만들고 근거를 찾는다. 그러는 사이에도 두 사람은 수차례 사랑에 빠졌고 번번이 실패로 끝을 맺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는 종종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이야기’라는 주제로 넘어간다. 두 사람 모두 이야기라면 일가견이 있었다. 아들은 소설가였고, 아버지는 ‘진짜 이야기꾼’이었다. 두 사람은 카페에 마주 앉아 인생을 관통하는 서사에 대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기억을 재구성하고 해석을 덧붙인다.
소설은 아버지가 허황되고 독특한 분석을 내놓으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내가 우리 집안의 저주 같은 것을 물려받은 건 아닌가 싶어. 그래서 그 저주를 너한테까지 물려주었고. …이를테면 사랑에 실패하게 만드는 유전자라고나 할까.” 아들은 이 견해를 가볍게 받아들였지만 아버지는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 가족력을 탐구한다.
아버지는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이야기를 믿기지 않을 만큼 풍성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아들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묻지만 아버지는 거짓은 없다고 할 뿐이다.
“꾸며낸 게 아니라 추론”이라며 꺼내 놓은 아버지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진짜 이야기꾼은 시간의 달인이자 일종의 요리사라고 할 수 있다. 그이들은 언제 청중에게 밑간을 해야 하는지, 어떤 향신료로 밑간에 풍미를 더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절묘하게 밑간이 더해진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밀려든다.
책은 공쿠르상을 수상한 프랑스 최고의 소설가 에릭 오르세나의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 속 화자인 아들 에릭 아르누는 저자의 본명이다. 소설가이면서 철학 경제학 정치학 등을 넘나드는 석학. 오랫동안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을 보좌했던 오르세나는 책 속에 자신의 삶을 투영해 깊이를 더했다.
아들과 아버지는 그래서 어떤 답을 찾았을까. 사실 결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유쾌한 농담과 수다스럽게 펼쳐내는 두 사람의 이야기, 그 자체가 주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