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유럽을 풍미했던 바로크 미술의 대가 루벤스(1577∼1640)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예쁜 딸이었다. 루벤스는 딸이 다섯 살이었을 때 그 앙증맞은 모습을 그렸다. 거장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빼어난 명작이었다.
오늘 소개하는 소녀 초상도 루벤스의 딸 클라라 세레나가 모델이다. 딸이 열두 살이 되자 다시 그린 걸로 추정되는 이 작은 초상화는 오랫동안 제자 작품으로 알려져 왔다. 때문에 그림을 갖고 있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은 2013년 소장품을 정리하며 경매에 내놓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추정가(2만∼3만 달러)의 30배에 달하는 62만 달러(6억7000만원)에 팔렸다. 진품임을 확신한 이들 간 경합이 뜨거웠던 것. 그 후 전문가들의 정밀 감정을 통해 진작으로 확인됐다. 투명한 흰 피부와 발그스레한 볼, 반짝이는 눈을 표현한 솜씨와 기법이 루벤스임에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작품에 낀 먼지와 덧씌워진 물감을 제거했더니 루벤스가 즐겨 썼던 오소리털 붓의 흔적도 확인됐다. 그러자 벨기에, 영국의 미술관이 앞다퉈 진품으로 소개했다. 5년간 이 그림을 갖고 있던 영국인 컬렉터는 오는 7월 5일 런던에서 열리는 경매에 그림을 내놓았다. 추정가는 무려 300만∼500만 파운드(44억∼73억원). 5년 전 낙찰가에 비해 10배나 높아졌다. 메트로폴리탄은 “우리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속은 편치 않을 듯하다.
학자들은 루벤스가 왕실과 귀족의 주문을 받고 그린 인물화들이 풍만하고 과장된 데 비해 이 초상은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감정이 이입돼 무척 애틋하다고 평했다. 소녀는 모델을 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12살이었으니 루벤스는 딸을 가슴에 묻었으리라.
이영란 미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