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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철의 왕국’ 아침 햇살에 깨어나다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동에 밀집된 고분 너머로 아침 해가 솟아오르고 있다. 붉은 빛이 잠들어 있는 1500여년 전 ‘신비의 왕국’ 대가야를 일깨우는 듯 장엄하다.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지산동 고분군은 경남 김해 대성동 및 함안 말이산의 고분군과 함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대가야박물관을 찾은 여행객이 갑옷과 투구 등 대가야의 무기를 살펴보고 있다.
 
대가야왕릉전시관 뒤로 고분과 주산이 이어진다.
 
가야금을 켜는 우륵상과 우륵박물관.
 
청동기시대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장기리 암각화.


‘산 위에 저게 뭐꼬.’ 500여년 전 지리산 아래 기거하던 선비 남명 조식이 경북 고령을 찾았다가 주산(311m) 허리춤에 봉긋봉긋한 대규모 고분군의 위용을 보고 놀라서 한 말이다. 고분군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해 고구려 신라 백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세력을 키운 대가야의 역사를 알려주는 ‘타임캡슐’이다.

삼국이 한반도를 지배하던 시기에 가야(伽耶·42∼562년)가 존재했다. 가야는 기원 전후를 기점으로 562년까지 주로 낙동강 하류 일대에서 번성했던 작은 나라들의 총칭이다. 삼한시대 변한의 12국에서 발전한 고령 대가야, 김해 금관가야, 성주 성산가야, 상주 고령가야, 함안 아라가야, 고성 소가야 등 크게 6가야로 구분된다.

금관가야는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쇠퇴의 길을 걷다가 532년 신라에 무릎을 꿇었다. 후기 가야시대 중심 국가였던 대가야는 신라와 백제·왜 연합군을 공격하다 패한 뒤 서기 562년(신라 진흥왕, 대가야 16대 도설지왕)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패망했다.

소국 연맹으로 치부돼 고대국가로 대접받지 못했지만 대가야는 수준 높은 문화와 활발한 대외 활동으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벌로 금관가야가 멸망한 4세기 후반부터 대가야는 전성기를 누렸다. 옛 가야 연맹 중 가장 강성했다. 하지만 562년 신라의 침입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가야 개국 이후 520년이다.

고령의 중심인 고령읍은 몇 해 전 대가야의 고장답게 대가야읍으로 행정구역명을 변경했다. 대가야읍 뒤로 우뚝 선 주산은 1500여 년 전 대가야의 숨결을 담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사적 79호)을 품고 있다. 지산동 고분군은 함안 말이산 고분군(사적 515호), 김해 대성동 고분군(사적 341호)과 함께 세계유산 우선 등재 목록에 선정돼 2020년 세계유산 등재를 목표로 하고 있다.

대가야를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대가야박물관을 찾아야 한다. 대가야의 성립·성장·발전·멸망에 관한 내용이 순서대로 꾸며져 있다. 돌화살촉·돌칼, 그릇받침과 그릇 등 다양한 토기류도 전시돼 있다. 특히 철기와 굽다리접시·그릇받침 같은 토기는 대가야가 얼마나 훌륭한 문명을 꽃피웠는지 보여준다. 물결무늬가 있거나 굽다리의 구멍이 세로로 나란히 뚫리는 등 대가야 양식 토기는 고령뿐 아니라 경남 합천·거창·함양·산청·창원을 비롯해 전북 남원·장수·진안 등에서도 나타난다.

바로 옆 대가야왕릉전시관으로 이동한다. 지산동 고분군 가운데 동서 지름 27m에 이르는 44호분을 실제 크기로 복원한 곳이다. 국내에서 처음 확인된 대규모 순장 무덤이다. 무덤 주인이 묻힌 9m가 넘는 구덩식 돌방 1기와 부장 무덤인 구덩식 돌방 2기를 비롯해 소형 돌덧널무덤 32기가 부채꼴로 배치돼 있다. 각 돌방과 덧널에는 무덤 주인을 가까이 모신 첩이나 시녀, 호위 무사, 노비 등 40여명이 순장됐다. 고분 안쪽으로 돌방 내부와 순장 형태를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지산동 고분군은 주산 능선을 따라 고분 700여기가 있다. 고분군 산책로 주변 통신 관로 공사 도중에 땅을 파는 곳마다 묘제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1500여 년 전 대가야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대가야왕릉전시관 옆길을 오르면 작은 고분들이 길을 따라 늘어서 있다. 올망졸망한 고분군 사이로 산책로가 있어 오붓하면서도 색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처음 능선 아래쪽에서 고분이 만들어지기 시작해 점차 능선을 따라 위쪽으로 들어섰다고 한다. 주산 정상으로 갈수록 규모가 커진다. 바닥 지름이 20m가 넘는 무덤만 해도 5기에 이른다.

중간쯤 올라 뒤돌아보면 고령 시내와 대가야통문 건너편으로 고분군이 이어진다. 중턱쯤에 자리잡은 소나무는 꿀맛 같은 휴식을 맛볼 수 있는 쉼터를 내준다. 읍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전망 포인트이다.

능선에 올라서면 금림왕릉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5호분이 앞에 우뚝하다. 멀리 합천 가야산도 눈에 들어온다. 이어 지산동 고분군에서 가장 높은 1호분에 이른다. 남쪽 능선으로 눈을 돌리면 부드럽게 솟은 봉분들의 행렬이 색다른 풍경화를 펼쳐놓는다. 고분 사이로 굽은 길이 아름답다. 마지막 고분군까지 느릿하게 산책하는 데 왕복 2시간이면 충분하다.

고분군은 이른 아침과 해질녘에 더욱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 천지를 붉게 물들이는 석양과 오렌지빛 아침 햇살이 봉분에 내려앉아 이루는 실루엣이 황홀하다. 아침 해를 품은 고분들이 햇살에 빛나면 신비감을 더한다. 그 사이를 날갯짓하는 산새들이 옛 가야인들을 깨우고 있다.

대가야박물관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우륵박물관이 있다. 악성 우륵과 가야금을 테마로 만들어졌다. 우륵은 대가야 가실왕 때 가야금을 만들고, 가야 12개 지역 이름을 따 ‘상가라도’ ‘하가라도’ 등 12곡을 지었다. 우륵은 신라로 망명할 때 ‘가야금’을 가지고 갔다. 신라 진흥왕은 우륵의 음악을 국가 대악(大樂)으로 삼았다.

박물관 입구에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의 조형물이 가장 먼저 반긴다. 규모가 크지 않지만 우륵의 생애와 가야금에 대한 이야기로 빼곡하다. 박물관 옆에 가야금을 제조하기 위한 오동나무 건조장이 있다. 최소 4년 이상 건조한 오동나무 중 뒤틀리지 않은 나무가 사용된다.

고령에서 꼭 들러봐야 할 곳이 쌍림면 합가리의 개실마을이다. 영남 사림학파의 중심인물인 점필재 김종직의 후손이 400년 가까이 모여 사는 선산 김씨 집성촌이다. 김종직은 조선 성종 때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조의제문’이란 글을 썼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했고, 세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예종·성종·연산군 등은 왕권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결국 연산군 때 조의제문을 빌미로 사림파였던 김종직 제자들이 대거 목숨을 잃었다. 김종직은 죽은 후였지만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무오사화다. 경남 밀양에 살던 후손들은 고령으로 몸을 피했고, 5대가 지나서야 복권이 됐다.

종택을 비롯해 다섯 개의 재실 등 옛 한옥들이 즐비하다. 한옥 지붕 기와가 만들어낸 부드러운 선을 감상하며 예스러운 돌담길 따라 마을을 산책하다 보면 점필재 종택도 만난다. 규모가 크지 않지만 정갈하고 기품이 넘친다. 서당인 도연재 담장 너머로 그 옛날 도란도란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마을에서는 엿만들기 등 사계절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 여행메모
장기리 암각화·한우 등 볼거리·먹거리 다양
13일까지 ‘어서와! 고령愛 처음이지?’ 운영


수도권에서 자가용으로 간다면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해 고령분기점에서 광주대구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고령나들목으로 나가면 가깝다. 고령읍 방향으로 달리면 고령군청 조금 못 미쳐 대가야박물관과 왕릉전시관, 지산동 고분군이 나타난다. 서울남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고령 읍내에 위치한 음식점 ‘대통대맛(054-956-3012)’의 주산왕대샤브샤브가 맛있다.  대통 속 육수에 소고기를 넣어 살짝 익히면 기름기가 빠져 담백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우시장이 서는 고령에서는 한우고기도 싼값에 즐길 수 있다. 동고령나들목 근처 금산한우(054-956-4484)가 유명하다. 김면장군유적, 장기리 암각화, 개경포기념공원, 미숭산자연휴양림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고령군은 오는 13일까지 ‘어서와! 고령愛 처음이지?’를 주제로 2018년 봄 여행주간을 운영중이다. 대가야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는 가야愛, 고령의 매력적인 길 걷기 도보愛, 아웃도어체험 캠핑愛, 전통과 넉넉한 인심을 느껴보는 농촌愛 등 테마 여행과 문화공연, 특별행사, 모바일게임, 스탬프투어 등으로 진행된다.

스탬프투어는 고령군 내 10곳의 관광지를 방문해 스탬프를 획득하면 기념품을 증정한다.

고령=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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