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업력 54년 26곳 취재… 웬만해선 직원 자르지 않아
재료 손질부터 맛내기 비법 음식에 대한 진심 안 변해
요리사·식당 운영자·작가… 요즘 4:4:2의 삶 살아 가장 좋은 호칭은 ‘주방장’
책을 읽다가 이런 대목에 눈길이 멈췄다. “직원들에 대해서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별나서 몇십 년씩 다니면서 고희와 팔순을 넘기는 직원이 흔하다. 있는 직원도 자르는 세상인데, 그들은 정년이 지나도 한참 지난 사람들을 끝까지 끌고 간다.”
저런 내용이 담긴 책은 ‘글쓰는 요리사’ 박찬일(53)이 펴낸 ‘노포의 장사법’(인플루엔셜·사진)이다. 박찬일은 한국의 노포(老鋪) 26곳을 취재해 이 책을 완성했다. 곰탕으로 유명한 하동관이나 냉면 맛집인 을지면옥처럼 유명 식당에 대한 이야기가 한가득 담겨 있다. 책에서 다루는 가게의 평균 업력(業歷)만 따져도 무려 54년에 달한다. 최근 서울 광화문 한 식당에서 만난 박찬일은 ‘노포의 장사법’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전 이런 말부터 꺼냈다.
“노포의 특징 중 하나가 ‘정년 없는 고용’이에요. 소 갈빗집 조선옥만 하더라도 박중규 주방장 나이가 79세예요. 입사 60년차예요. 왜 저렇게 나이 지긋한 어르신을 쓰는지 창업주의 자녀들은 의아해하죠. 하지만 같이 일해 보면 느끼게 돼요. 느리게 일하지만 누구보다 빠르다는 것을. 일을 하는 데 있어 군더더기가 없거든요. ‘경험의 가치’를 실감하는 거예요.”
‘노포의 장사법’은 박찬일이 2014년 출간한 ‘백년식당’(중앙M&B)의 후속작이다. 전작에서 그는 해장국으로 유명한 청진옥이나 평양냉면의 명가인 우래옥 등을 소개했다. 박찬일은 노포를 “한 입 베어 물면 입 안에 한 시대가 들어오는 듯한 식당”이라고 규정했는데, 실제로 책에 담긴 글을 읽으면서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입 안 가득 침이 고이게 된다.
“5년 전 서울 흑석동에 있는 오래된 식당에서 여행 작가인 노중훈과 밥을 먹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참 이런 식당을 좋아하는데, 이런 곳을 글로 써보면 어떨까.’ 그렇게 소박한 생각으로 시작한 작업이었어요. 그런데 사명감이 생기더군요. 노포는 우리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노포를 취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가게의 주인장들은 노포의 역사를 취재하려는 박찬일을 마뜩잖게 여겼다. 취재를 빌미로 돈을 뜯어내거나 물건을 강매하려 한 사람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이미 유명 식당이니 취재에 응할 필요도 없었다.
박찬일은 “취재의 목적이 식당 홍보가 아니라 가게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라고 거듭 설득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회학자가 당대의 사회상을 조사하듯이 식당을 취재했다”며 “노포의 가치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책은 얼마간 자기계발서나 경제경영서의 성격까지 띠고 있다. 이런 분야의 책을 찾는 독자에게 유용할 메시지가 녹아 있어서다. 박찬일이 둘러본 상당수 노포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았다. 이문을 남기는 걸 우선시하기보다 내공을 키우면서 조금은 밑지더라도 우직한 태도로 장사를 해왔다는 것. 그는 노포의 장사법을 이렇게 소개한다.
“가장 중요한 건 한결같음이다. 사소할 것 같은 재료 손질, 오직 전래의 기법대로 내는 일품의 맛, 거기에 손님들의 호응으로 생겨난 기묘한 연대감 같은 것들이 감탄을 자아낸다. …사명감을 가지고 음식을 대하는 주인장의 진심은 변하지 않는다.”
박찬일은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하다가 이탈리아로 요리 유학을 다녀온 뒤 셰프로 변신했다. 미문의 에세이스트로도 유명하다. 그가 각각 서울 서교동과 광화문에 운영하는 식당인 ‘로칸다 몽로’와 ‘광화문국밥’은 미식가들이 인정하는 서울의 맛집으로 자리매김했다.
“요리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저의 정체성은 99%가 요리사였어요. 지금도 ‘주방장’이라는 호칭을 가장 좋아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10시간 일을 한다면 4시간은 요리사로, 4시간은 식당 운영자로, 2시간은 작가로 살고 있는 거 같아요(웃음).”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사진=최종학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