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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칸타타] “약자 돕는 건 신앙훈련이자 믿음의 실천”

윤영애 선교사가 최근 경기도 광주 순암로 자택에서 인터뷰한 후 포즈를 취했다.
 
윤영애 선교사(가운데)가 1990년 10월 26일 일본 도카시키 섬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추모하고 있다.윤영애 선교사 제공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힘.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데서 시작된다. 한국교회 여성운동의 최전방에서 활동했던 윤영애(75) 선교사는 나라를 잃고 나그네가 된 이들의 아픔을 깊이 공감하며 살았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총무로 활동할 당시 일본군 위안부, 원폭 피해자, 사할린 교포를 돕기 위한 활동을 했다. 2004년부터 러시아 볼고그라드주 노보니콜스코예에서 고려인 선교를 하고 있다. 최근 윤 선교사를 경기도 광주 순암로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1985년부터 8년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총무로 일했다. 87년 이효재 전 이화여대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시민운동으로 확산되려면 여성단체의 힘이 필요하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90년 11월 16일 여성운동 차원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조직됐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사무실을 함께 쓰면서, 그가 총무대리를 맡고 교회여성연합회 직원이 간사가 됐다.

“91년 4월 일본대사관 참사관 오노는 일본군 강제위안부 문제에 대해 ‘살아있는 사람이 없으니, 증거가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종군 위안부로 강제연행당한 분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지요.”

그해 7월, 1세대 원폭 피해자 할머니가 한 분을 모시고 왔다. 정신대 최초 신고자 김학순(연동교회) 할머니였다. 천식에 걸린 할머니는 한숨을 쉬어 가며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저놈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나를 주님이 살려둔 것은 이때를 위함”이라고 말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만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며 기자회견을 했고 많은 일본군 강제위안부 할머니들이 용기를 얻었어요.”

그는 90년 10월 26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추모하기 위해 일본 도카시키 섬으로 가던 길을 잊지 못한다. 검푸른 파도가 출렁거리는 모습을 본 순간, 50년 전 이 바다를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었을 열일곱 살짜리 소녀들이 떠올랐다.

“당시 제 딸이 열일곱 살이었어요. 얼마나 무서웠을까.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마치 아이들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했어요. 나라 잃은 엄마들은 그렇게 제 자식조차 지킬 수 없었지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어요.”

그는 3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대구 박애원을 세운 윤고성 장로이다. 그의 부모는 많은 시련을 믿음으로 극복했고 나라를 위해 늘 기도했다. 고아들을 돌보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그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보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다.

그의 인생에 또 한 차례의 변화가 찾아 왔다. 모교인 서울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2002년 2월, 출석하던 높은뜻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로부터 힘겹게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교회여성연합회 총무로 일할 때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원폭 피해자, 사할린 동포들을 위해 일했는데 모두 나라 없는 서러움을 체험한 사람들이었어요. 강제로 이주당하고 불안하게 사는 고려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어요. 적지 않은 나이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다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은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는 2004년 10월 높은뜻숭의교회 전문인 선교사로 남편 남국치(78) 장로와 함께 러시아 볼고그라드주 노보니콜스코예에 파송됐다. 파송전 2년간 한글교사 연수를 받고 미용기술, 웹디자인을 배우며 선교사 교육을 받았다. “영하 40도의 추위, 병원과 경찰서는 물론 전화도 없고 버스는 하루에 2번만 다니는 곳입니다. 선교사를 몰아내려는 협박과 함정도 많았어요. 그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했어요. 한마음의집(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재봉틀로 아기 돌옷을 만들었는데, 주민들이 옷을 만들며 아기를 축복하던 표정은 큰 은혜였습니다. 장날 월요카페를 열고 그 돈을 모아 러시아인들을 돕고 있습니다.”

교회에 전임 사역자가 세워진 2013년 이후엔 그는 매년 두 달 정도 머물며 선교한다. 그는 그동안의 경험이 러시아 고려인 선교를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경험시켜주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달 말, 러시아로 떠나는 그는 고려인들에게 가르쳐줄 한국무용 장구 난타 한복 만들기를 배우느라 분주하지만 행복하다고 말했다. “건강만 주신다면 계속 선교사로 살고 싶어요.”

그는 교회 여성들이 사회구원에 관심 두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현장에서 있는 예수를 만나길 바랍니다. 약자를 돌보는 것은 신앙 훈련입니다. 믿음의 메시지를 삶의 현장에 실천하길 바랍니다.”

글·사진=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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