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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핸들 잡고 하루 18시간… 노동, 문장이 되다





시내버스 운전기사 허혁(53)씨가 출판사 수오서재에 투고한 건 지난 2월이었다. 원고엔 격일로 하루 18시간씩 운전대를 잡으며 느낀 회한과 고충의 스토리가 실려 있었다. 이 책의 편집자인 황은희씨는 17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원고를 읽는데 계속 울컥하더군요. 머리를 굴려서 쓴 글이 아니었어요. 책을 내자고 곧바로 연락을 드렸죠.”

허씨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책을 출간한 소감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기뻐하는 감정이 묻어났다. “책을 낸 뒤 기자들한테서 연락이 많이 오는데, 이게 언론에서 소개할 만한 책이던가요? 지금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통화를 하는 내내 그는 자신의 작품이 제법 훌륭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 허씨가 펴낸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는 누구에게나 뭉근한 감동과 훈훈한 웃음을 선사할 만한 신간이다. ‘그냥 버스기사’가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필력이 보통이 아니다.

전북 전주에서 나고 자란 허씨는 지금도 전주에 살고 있다. 과거엔 조그만 가구점을 18년간 운영했는데, “잔머리 그만 쓰고 예술을 하고 싶어서” 장사를 접었다고 한다. “막연하게 시를 써보고자 했으나 내 영혼이 시에 닿질 못해서” 버스 운전대를 잡았다는 게 전업의 변(辯)이다. 관광버스를 2년간 몰았고, 5년 전부터는 시내버스를 운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궁금할 것이다. 왜 버스는 무시로 끼어들 때가 많은지, 정류장을 지나쳐버리거나 가끔씩 신호까지 무시하고 도로를 내달리는지. 이 책에는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이 담겨 있다. 기사들 입장에서는 배차 간격을 맞추려면 일각이 여삼추처럼 느껴지니 “신호나 정류장을 잘 까고(무시하고) 다녀야 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불친절한 기사가 많은 걸까. 그건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된다. 격일로 하루 18시간씩 운전대를 잡는 건 엄청난 중노동이다. “한마디로 미친 짓”이고, “기사들에 대한 사회적 학대”이며, “봉건제적 야만”이다.

이 책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고 신영복 선생님께서는 감옥이 대학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외람되지만 나는 시내버스가 대학이다.” 이어지는 문장은 이렇다. “육십이 이순인데 시내버스는 3년이 이순이란다. 어떤 소리가 날아와도 마음에 평화를 잃지 않고 응대할 수 있단다. …삶의 목적이 인격 성숙이라면 전주 시내버스만 한 대학도 드물 것이다.”

시내버스 기사의 고충을 실감케 만드는 내용이 뼈대를 이루지만, 빙긋이 미소를 짓게 만드는 에피소드도 곳곳에 등장한다. 버스를 기다리던 시민이 ‘타지 않으니 그냥 가시라’는 뉘앙스로 손을 흔들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단다. 허씨는 언젠가 한 여중생이 그렇게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이 하도 예뻐 보여 “국군의 날 도열하는 군인처럼 거수경례를 멋지게 붙여줬다”고 한다. 그는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서 버스운전을 하는 사람은 없다”며 “아무리 불량기사라도 마음 한편에는 승객의 욕망을 실현해주는 데 큰 보람을 갖는다”고 적었다.

관광버스를 운전할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결혼식 단체 하객을 태우고 도시를 오가던 길이었다. 버스 안에서는 ‘신바람 이박사’ 음악이 울려 퍼졌고 한바탕 춤판이 벌어졌다. 그런데 별안간 허씨는 코끝이 매워지면서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멈출 줄을 몰랐다. 그 뒤에 그날 왜 그렇게 슬피 울었는지 차분히 생각해보았다. 별것 없었다. 내가 대견해서 그렇게 울었다. 가게 팔고 반년도 안 돼 관광차 몰고 시골 아주머니 아저씨들 원 없이 춤추고 놀게 해준 내 자신이 너무 멋져서 그렇게 울었다.”

일점일획도 허투루 여겨지지 않는 귀한 에세이다. 줄을 그으면서 읽다가 좋은 글귀가 너무 많아 줄긋기를 멈춰야 했다. 허씨는 “몸으로 먹고사는 사람은 팔짱 끼고 자신을 부리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적었는데, 그 이유를 실감할 수 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저자인 김민섭씨는 추천사에 “노동하는 한 인간의 고백만큼 특별하고 힘 있는 글은 없다”고 썼다. 허씨는 지금도 전주 어디선가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가요, 잉∼”이라고 외치며 힘차게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을 것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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