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시사  >  출판

[책과 길] 고통의 최전선에서 말을 건네는 사람들


 
한미수필문학상 15∼17회에서 각각 대상을 수상한 의사 남궁인 김원석 오흥권(왼쪽 사진부터). 청년의사 제공


의사는 물었다. 아픈 손 때문에 가장 불편한 게 뭐냐고. 환자는 “악수”라고 짧게 답했다. 아픔 탓에 그 누구의 손도 잡을 수 없으니 환자에겐 악수가 제일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환자는 양손에 “커다란 뿔이 주렁주렁 달린” 대학생이었다. 뿔이라고 표현했지만 환자의 손을 흉측하게 만든 건 엄청난 크기의 사마귀였다. 사마귀는 피부에 기생충처럼 억척스럽게 달라붙어서 냉동치료로 얼려 죽여도, 레이저로 불태워 죽여도 또다시 돋아나곤 했다.

의사는 환자를 회피하고 싶었지만 “초점 없이 바라보는” 눈빛 탓에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치료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차도는 없었다. 레이저 치료를 하는 날이면 치료실은 고통의 절규로 가득 찼다. 의사는 말한다. “치료실이 아닌 고문장에 가까웠다”고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는 피부를 벗기는 건선약(乾癬藥)이 사마귀를 없애는 데 효과가 있다는 논문을 발견한다. 환자가 약을 받아가고 한 달쯤 흘렀을까. 사마귀는 반으로 줄어 있었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부력의 법칙을 깨닫고 벌거벗은 채 목욕탕을 뛰쳐나와 ‘유레카’를 외친 아르키메데스의 기분이 이랬을까? 처음으로 우리는 ‘완치’란 단어를 입에 올렸다.”

의사는 결국 사마귀 치료에 성공했다. 다른 병원으로 근무지를 옮기던 날, 의사는 환자의 손을 움켜쥐면서 미소 띤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자, 우리 이제 다신 보지 말자.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제일 큰 축복의 말이다. 마지막이니까 악수하고 헤어져야지. 쿨하게.”

‘그는 가고 나는 남아서’에는 이렇듯 고통의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는 의사들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책장을 넘기고 있노라면 의술이 인술(仁術)이 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눈가가 알싸해지는 에세이들은 순간순간 독자의 마음을 베고 지나갈 것이다.

책에는 한미수필문학상 15∼17회 수상작 40편이 담겨 있다. 2001년 시작된 이 문학상은 의학계의 신춘문예로 통하는데, 매년 의사들을 상대로 작품을 공모해 수상작을 가린다.

의료계 신문인 청년의사가 주최하고 한미약품이 후원하는 행사다. 수상작 작품집은 2003년부터 3년 간격으로 출간되고 있다. 애끊는 고통의 현장에서 펜을 들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한 의사의 글에 관심이 가는 독자라면 읽어볼 만한 시리즈다.

전작들이 그랬듯 이번 작품집에도 적지 않은 감동을 선사하는 글이 한가득 실려 있다. ‘목화송이 한 바구니’라는 작품을 보자. 의사는 바구니에 복슬복슬한 목화송이를 담아 진료실에 두었는데, 암으로 투병하던 할머니가 목화송이 몇 개만 달라고 부탁한다.

“할머니, 목화송이 드리면 어디에 쓰려고요?”

“원장 선상님, 목화송이를 한번 손에 쥐고 있어 보세요. 눈보다 더 흰 이놈들을 잠시만 쥐고 있어도 손이 겁나게 따스해집니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들려준다. 6·25 때 남편을 잃고 매운 시집살이 견뎌내며 길쌈하는 재미로 외로움을 이겨낸 시절 얘기를 말이다.

“할머니는 내게서 가져가신 목화송이들을 자신의 방 경대 앞에 두고 있다며, 목화송이를 바라볼 때마다 그 옛날 외롭게 보낸 젊은 시절이 떠오른단다. …할머니는 올봄에는 목화씨도 심어 꽃도 피우게 하고 새 목화송이가 피는 것까지 보고 죽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최근 2∼3년 동안 출판계에는 아툴 가완디나 폴 칼라니티, 남궁인이나 김정욱처럼 ‘의사 작가’들의 작품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이들이 주목을 받는 건 예사롭지 않은 필력 때문이겠지만, 동시에 의사만큼 삶과 죽음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는 직업군이 없어서일 것이다. 15회 한미수필문학상 대상 수상자인 남궁인은 이런 수상 소감을 남겼다. “보통의 시선으로 병원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보고, 따뜻한 마음을 품고, 낮은 눈높이에서 사실을 서술했다.” 어쩌면 이 말은 작품집에 실린 모든 글에 적용되는 얘기일 것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