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통수 맞고도 ‘공손 모드’ 매우 절제된 유감 표명… 트럼프의 호평 이끌어내
“北 핵동결 통해 외교적 우위… 美 , 압박·대화 기로” 분석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하자 북한의 태도가 돌변했다. ‘상상도 하지 못한 끔찍한 비극’ ‘핵 대 핵 대결’ 등 회담 취소 직전까지 미국을 향해 쏟아내던 거친 막말들을 하루 만에 주워 담았다. 북한으로서도 이번 북·미 정상회담 결렬이 상당히 아쉽다는 속내를 그대로 드러냈다.
북한은 북·미 관계 정상화 의지를 강조하면서 미국과의 대화를 계속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북·미 정상회담을 이미 한 차례 걷어찬 미국은 북한이 진정성 있는 비핵화 입장을 밝히기 전까지는 북한과의 대화에 선뜻 나서기 어렵게 됐다.
북·미 정상회담 취소에 대한 김계관(사진)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담화는 북측 공식 입장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일찍 나왔다. 김 제1부상 담화가 조선중앙통신에 공개된 시간은 우리 시간으로 25일 오전 7시24분이다. 북·미 정상회담 취소 결정을 담은 트럼프 대통령의 편지가 공개된 건 전날인 24일 오후 10시48분이었다. 8시간 만에 북한의 입장이 정리된 것이다. 편지 접수 후 내부 논의를 거쳐 공식 입장을 확정하고 이를 관영 매체에 공개하는 등의 절차를 고려하면 북한 당국자들은 밤을 새워 작업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 제1부상 담화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위임에 따라 발표된 점도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김 제1부상의 지난 16일 담화,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지난 24일 담화와 달리 이번 담화는 최고지도자의 진심이 담겨있다는 의미다. 외무성 라인의 대미 강경 발언을 개인 의견으로 일축함으로써 김 위원장 자신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에 나설 의향이 남아있음을 부각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이 “매우 좋은 뉴스”라고 화답했다. 북한의 재빠르고 성의있는 조치가 효과를 본 셈이다. 북·미 간 물밑 접촉도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우선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에 다시 나설 명분을 얻으려면 북한이 먼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에 준하는 핵 폐기 의사부터 밝혀야 한다. 하지만 북한은 일방적 핵 폐기 선언을 미국에 굴복하는 행위로 보고 있다. 그렇다고 미국이 북한이 원하는 대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북·미 핵 군축 협상을 열 수도 없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려면 비핵화에 대한 양측의 견해 차이가 조정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를 완료했고 미국인 억류자도 돌려보냈다. 이를 통해 비핵화에 대한 진전된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도 자신들이 대화에 진정성을 갖고 있음을 국제사회에 어필하는 데 성공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파기한 책임을 미국에 돌릴 수 있는 여건인 셈이다. 북한은 마지막까지 북·미 대화를 유지하려 했다는 인상을 심어줌으로써 북·중 관계에서도 명분을 쌓았다. 북한은 자신들이 아닌 미국 때문에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됐음을 강변하며 중국이 대북 경제제재를 해제토록 요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고명현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은 핵 동결 조치를 통해 외교적 우위를 점했다”고 평가했다. 고 위원은 “북한이 앞으로 도발 없이 대화만 줄곧 요구한다면 미국도 대북 압박을 이어갈 수 없다”며 “그때 미국은 대북 압박을 지속할지, 다시 대화를 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것이 북한의 노림수 같다”고 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